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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품은 우리 동네] (28)대구 종로

[길을 품은 우리 동네] (28)대구 종로

입력 2012-11-28 00:00
업데이트 2012-11-28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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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요정·청요릿집 ‘불야성’… 이젠 갤러리·공방의 거리로

조선 시대 도성에는 종루가 있었다. 종루에서 나오는 종소리로 도성의 문을 여닫았다. 종소리는 시계가 보급되기 전, 사람들이 시간을 인식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종소리가 들리는 만큼을 도성의 중심으로 여겼다. 서울의 중심에 종루가 있었다면 대구에도 읍성 남쪽에 종루가 있었다. 그 앞을 지나는 길은 서울이든 대구든 종로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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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마당 깊은 집’의 주인공 길남이 조형물. 소설가 김원일의 자전적 소설로 작가가 살았던 집이 종로 인근에 있다.
소설 ‘마당 깊은 집’의 주인공 길남이 조형물. 소설가 김원일의 자전적 소설로 작가가 살았던 집이 종로 인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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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비된 종로.대구 중구청이 ‘걷고 싶은 거리, 테마가 있는 거리’사업을 펼쳐 종로가 차츰 활기를 되찾고 있다.
재정비된 종로.대구 중구청이 ‘걷고 싶은 거리, 테마가 있는 거리’사업을 펼쳐 종로가 차츰 활기를 되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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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화교협회 건물. 종로가 화교의 본거지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대구화교협회 건물. 종로가 화교의 본거지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종루는 소리를 잃었지만 종로는 도시의 중심을 굳건히 지켜왔다.

하지만 1904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종로는 중심 통로로서의 기능을 점차 잃어갔다. 이 사업을 계기로 일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대구에 진출했고 이들은 대구역 인근 북성로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 일제는 자국민을 위해 신작로를 뚫었다. 경상감영 앞을 동서로 지나는 거리를 만들어 여기에 관청과 금융기관 등을 속속 입주시키며 종로의 세를 조금씩 빼앗아 갔다.

대신 종로에는 요정들이 들어와 대구의 밤 문화를 지배했다. 종로와 수동, 상서동 일대만 요정이 50개를 넘었고 수백명의 기생들이 드나들어 1960년대 후반까지도 불야성을 이뤘다.

종로는 화교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1905년부터 화교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다 해방 직후 화교들의 경제활동이 크게 번창하면서 종로 일대의 부지를 매입하여 특색 있는 건물을 지었다. 당시 대구 화교의 지도자였던 모문금, 연보주 같은 이들의 역할이 컸다. 화교협회, 화교 소학교와 중학교, 화교성당, 화교교회, 그리고 1920년대에 문을 연 지역 최고의 청요릿집 군방각 같은 건물들이 들어섰다. 이들 건물은 중국인 기술자들이 평양에서 구워온 붉은 벽돌과 금강산에서 베어온 나무로 지었다고 한다. 1950년 5000명이 넘기도 했던 대구 화교들은 이후 정부의 외국인등록제, 외국인 토지소유금지법 등 여러 규제로 타이완, 미국 등지로 터전을 옮겨 지금은 950여명에 그치고 있다.

화교들에 이어 종로 상권을 장악한 것은 가구상들이었다. 목공소와 농방 등 소규모 점포 5~6개가 들어서면서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한 가구거리의 면모는 1950년대 후반 ‘가구사’란 간판들이 잇따라 내걸리면서 일반인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10여년 동안 꾸준히 가구점이 늘어 1970년대 초에는 만경관 네거리~염매시장 입구거리에 50개가 넘는 가구점, 공예사가 있었다.

가구상들이 번성하자 철물점과 금고상 등 관련 업종까지 함께 모여들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유통망과 가격 경쟁력을 갖춘 대형 가구기업들이 밀고 내려오자 가구상들도 결국 종로의 주인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빈 건물이 방치되다 쇠락의 길로 내 몰렸다. 더구나 인근 동성로에 인파가 몰리고 대중교통전용지구사업으로 차량마저 접근하기 힘들면서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이에 관할 구청인 중구청이 5년전 도심재창조란 주제로 ‘걷고 싶은 거리, 테마가 있는 거리’사업을 펼쳤다. 박동신 중구청 전략경영실장은 “종로는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데다 쉼터나 벤치도 조성되지 않아 사람보다는 차가 우선인 거리였다. 또 전통거리로서의 특성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에 쌈지공원과 작은 도서관을 만들고 건물 곳곳에 종로의 역사를 소개하는 벽화를 그렸다. 거리 양쪽에는 청사초롱을 매달아 전통미를 살렸다. 종로 인근이 소설 ‘마당 깊은 집’의 실제 배경이었다는 점도 강조했다. 소설 속 상황을 상상할 수 있도록 주인공 길남이와 길남이 엄마를 형상화한 입체 조형물 2개를 설치했다. 마당 깊은 집 내용과 1950년대 대구의 모습을 담아 시대적 문화를 엿보는 스토리공간인 스토리보드를 설치했다.

이 같은 노력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재 종로에는 차, 다기, 천연염색, 골동품 등을 취급하는 40여개의 점포가 성업 중이다. 곳곳에 작고 실험적인 갤러리나 공방 등도 함께해 전통거리라는 명성을 되찾고 있다.

박 실장은 “차와 다기 전문점에 이어 천연염색, 골동품, 전통음식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는 데다 이를 전시하는 갤러리들이 최근 생겨나고 있는 것도 새로운 종로의 모습이다.”며 “현대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염매시장 떡집들도 종로로 옮겨오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생명과 동아쇼핑 등 대형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종로 인근에는 원룸촌도 활발히 형성되고 있다. 또 일부 젊은 층들도 동성로에서 종로로 발길을 돌리면서 이들을 겨냥한 식당들도 들어서고 있다. 이 곳에서 식당을 하는 한 주인은 “젊은 층과 주위의 유통업·금융업 등에 종사하는 손님들이 부쩍 늘고 있다.”며 “저녁 늦게까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비는 식당들이 많다.”고 밝혔다. 최병헌 종로상가번영회 회장은 “종로가 먹거리 골목으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종로 발전을 위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에게 환한 미소와 친절로 정성을 다할 것이다. 회원 간의 단합과 정보교류로 삶의 터전인 종로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전의 문화도 여전히 살아있다. 화교학교와 영생덕 만두집, 복해반점, 경희반점 등은 아직도 남아 과거 이 일대를 장악했던 화교들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대구화교협회가 종로에서 화교문화축제를 7년전부터 매년 열고 있다.

종로는 앞으로가 더 주목된다. 종로 일대를 살기 좋은 지역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국토해양부 시범사업으로 선정된 데다 지속적으로 종로를 특색 있는 전통거리로 만들어 가겠다는 중구청의 각오 덕분이다. 매월 전통차, 천연염색, 한복 등 테마별로 축제를 열어 대구의 멋과 역사 문화를 소개함으로써 대구를 대표하는 거리로 만드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때마침 이곳 상인들도 전통문화거리 만들기에 동참하고 있다.

박 실장은 “아름다운 종로로 꾸미는 운동을 펼치겠다. 상가 앞 화분 내놓기 운동 등도 실천하고 자체 축제도 성사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29회에는 울산 중구 외솔큰길을 소개합니다.

2012-11-28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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