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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가을의 시

[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가을의 시

이순녀 기자
이순녀 기자
입력 2016-10-12 22:16
업데이트 2016-10-12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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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시감이 맛있는 계절, 가을이다. 가을에 대한 시를 골라 보려고 머릿속을 뒤지고 책장을 뒤지고 인터넷을 뒤졌는데, 괜찮은 시가 없다. 가을을 제목으로 삼은 최고의 시는 릴케의 ‘가을날’인데, 그 시는 이미 내가 해냄출판사에서 펴낸 책 ‘내가 사랑하는 시’에 실렸다. 겨울을 노래한 영시는 많은데, 가을을 노래한 시는 드물고 수준도 떨어진다. 왜일까? 우중충하고 비가 잦고 으스스한 영국의 가을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아서, 시심이 발동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처럼 높고 푸른 하늘이 아니라, 낮에도 해를 보기 힘드니 보통사람도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데 시인들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을 게다. 우리말로 가을을 노래한 시는? 수두룩 많지만, 최승자 선생의 치명적인 첫 행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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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송원  기자
김송원 기자
개 같은 가을이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최승자 시집 ‘이 時代의 사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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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
최영미 시인
서른 살 무렵에 그이의 시를 처음 읽고 나는 휘청거렸다. 함께 대학원을 다니던 H와 최승자를 이야기하다 우리는 친해졌다. 이런 시가 있었네 우리나라에.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페미니즘 세례를 받았던 우리는 여전사처럼 피투성이인 그녀를 사랑했다.

나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뒤표지에 들어갈 추천사를 어떤 여성시인에게 받을까?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최승자 선생님의 시처럼 멋진 촌평을 받고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나중에 내가 만난 최승자 시인은 ‘피투성이 여전사’라는 내 머리에 박힌 이미지와는 다른, 여리고 조용한 분이었다. 내가 쓴 시를 나보다 더 잘 알고, 넓고 깊은 통찰과 살뜰한 언어로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축하해 준 최 선생님에게 그동안 고마움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해 아쉬웠다. 부디 건강하시기를 멀리서 빈다. 그렇게 강렬한 맛은 없지만,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73도 가을에 읽을 만하다.

찬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위에

노란 잎사귀들이 몇 개 매달린, 혹은 잎이 다 떨어진

계절을 그대는 내게서 본다.

사랑스러운 새들이 노래하던 성가대는 폐허가 되었지.

해가 서쪽으로 진 뒤에

희미해진 석양을 그대는 내게서 본다.

모든 것을 덮어 잠들게 하는 죽음의 분신(分身)인

검은 밤이 야금야금 황혼을 몰아내고,

불이 꺼져 죽을 침대 위에서

그를 키워준 나무에 잡아먹히는 장작불처럼,

젊음이 타다 남은 재 위에 누워

빛나는 불꽃을 그대는 내게서 본다

이걸 알게 된 그대는, 사랑이 더 강렬해지지.

머지않아 그대가 떠나보내야 할 사람을 깊이 사랑하게 되지

That time of year thou may’st in me behold

When yellow leaves, or none, or few, do hang

Upon those boughs which shake against the cold,

Bare ruin’d choirs, where late the sweet birds sang.

In me thou see’st the twilight of such day,

As after sunset fadeth in the west,

Which by-and-by black night doth take away,

Death’s second self, that seals up all in rest.

In me thou see‘st the glowing of such fire

That on the ashes of his youth doth lie,

As the death-bed whereon it must expire

Consum’d with that which it was nourish’d by.

This thou perceivest, which makes thy love more strong,

To love that well which thou must leave ere long.

*

나는 젊음의 죽어가는 불꽃 위에 누운, 타다 남은 장작불 같다는 시인의 고백이 쓸쓸하다. 그보다 나이가 한참 아래인 청년을 가까이했기에, 하루하루 늙어가는 자신을 분명히 티 나게 인식했을 터. 신문연재를 시작한 이래 제일 어려운 번역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73번이었다. 뭘 지칭하는지 애매한 대명사들 때문에 고생했다.

7행의 ‘검은 밤 black night’은 죽음의 은유이다.

12행이 제일 난해한데, 20세기 초에 어느 학자가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았다. “As the fire goes out when the wood which has been feeding it is consumed, so is life extinguished when the strength of youth is past.” (불을 먹여살리던 나무가 다 소진되면 불이 꺼지듯이, 젊음의 힘이 사라지면 삶도 소멸한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해석하느라 며칠, 내 젊음의 불이 꽤나 소진되었다.

14행을 어떻게 풀이할지,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다. 시인의 대화 상대인 젊은 그대가 머지않아 (포기하고) 떠나야 할 것을 ‘젊음’으로 번역하려다 ‘사람’으로 바꾸었다. 사랑의 대상을 지금 젊은 그대가 곧 잃어버릴 ‘젊음’으로 봐도 좋다.

시는 이쯤 내려두고…. 달고 떫은 단감을 먹으며, 개 같은 가을을 통과해야겠다.
2016-10-13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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