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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의 산중일기] 씨앗은 진퇴를 안다

[정찬주의 산중일기] 씨앗은 진퇴를 안다

입력 2017-04-10 22:36
업데이트 2017-04-11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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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에 살다 보니 날씨에 민감해진 것 같다. 아침에는 바람이 불지 않다가도 오후가 되면 샛바람이나 마파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그래도 부드럽고 축축한 봄바람은 곧 봄비가 올 것이니 농사일을 준비하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농부들은 다랑이 논밭에서 쟁기질을 하고 있다. 농부의 쟁기질을 볼 때마다 금언 하나가 늘 떠오른다. ‘쟁기를 잡았으면 뒤돌아보지 말라’는 금언이다. 운전대 잡은 사람이 뒤를 보면서 앞으로 갈 수는 없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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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책하면서 노인 농부들을 만나면 인사를 나누곤 한다. 그러나 농기계를 움직이는 젊은 농사꾼은 기계음 소리가 시끄러운 탓에 그냥 지나쳐 버린다. 이미 고인이 된 농부 황씨는 내게 여러 가지 추억을 남겨 준 분이다. 나보다 예닐곱 살 위인 황씨는 생면부지의 나를 ‘동상’(동생)이라고 불렀다. 나는 황씨 집 앞으로 난 산길을 지날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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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소설가
정찬주 소설가
황씨는 일하다가도 달려와 나를 자기 집으로 끌고 가서 툇마루에 앉혔다. 그는 여느 농사꾼과 달리 꽃과 술을 좋아했던 것 같다. 술로 명을 재촉한 사람은 있어도 꽃으로 병이 깊어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황씨 역시 술병이 들어 칠십을 갓 넘긴 나이임에도 하늘이 데려갔기 때문이다. 그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 농사에 얽힌 속담들이다. 황씨는 속담 비슷한 말을 지어 내게 들려주기도 했다.

‘제비와 스님은 올 때는 알지만 갈 때는 모른다.’

절골 마을에 터를 잡고 산 그가 제비와 스님들의 행동 방식을 눈여겨보고 지은 말이다. 삼짇날 무렵에 오는 제비나 절에 낯선 스님이 오면 금세 눈에 띈다. 그러나 제비는 중양절 전후로 홀연히 사라지고, 스님은 예고 없이 절을 떠나 버리곤 한다. 제비와 스님 모두가 몰종적(沒?迹)의 눈부신 경지다.

요즘 산방 안팎으로 나무들의 개화가 한창이다. 매화는 이미 낙화한 지 며칠 됐고, 진달래꽃과 목련 꽃이 만개해 불을 켜 놓은 듯 산방 둘레가 환하다. 특히 사립문 밖의 자두나무 꽃이 팝콘처럼 일제히 터지기 시작했고 태산목 밑의 명자나무 꽃망울도 안간힘을 쓰고 있다. 꽃은 답답한 마음을 가시게 하는 치유력이 있다. 나로 인해 우울해하는 안사람의 마음을 풀어 주는 것도 꽃일 때가 많다. ‘여보, 이리 와 봐요. 자두 꽃이 피었소’라고 하면 마지못한 척 따라 나와서 꽃을 보며 웃는 것이다. 누구라도 미소 짓는 순간에는 붓다가 된다고 했다. 웃는 꽃을 보고 얼굴 찌푸리는 사람은 아마도 이 세상에는 없으리라.

그제는 농사일하기 좋은 청명(淸明)이었다.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는 절기였다. 한식(寒食)이자 식목일에는 봄비가 온다고 하므로 텃밭에 무슨 농사를 지을까 하고 다급하게 궁리했다. 텃밭은 이미 흙을 뒤집어 두둑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안사람은 도예공방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밭두둑에 도라지 씨앗을 뿌리자고 거들었다. 별처럼 피어나는 도라지꽃을 보고 싶은 것이 안사람의 속셈이었다.

나는 안사람과 다르게 요량하면서 맞장구쳤다. 기관지는 물론 뇌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미세먼지로부터 내 몸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도라지를 떠올렸던 것이다. 안사람이 낭만적이라면 나는 실용적인 인간인 셈이다. 그러나 산중에서는 병원이 원거리에 있으므로 민간요법이라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어느 고을이 장날인지를 따져 보니 마침 4일, 9일에 서는 복내장이 있었다. 고개를 하나 넘어 30리쯤 가면 복내면 소재지이니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다. 결국 도라지를 심어 본 지인에게 부탁했더니 오후 3시쯤 도라지 씨앗 두 홉과 왕겨 한 가마니를 가져왔다. 채송화 씨같이 생긴 도라지 씨앗 두 홉에 1만원이라고 하니 아주 싼 편이었다.

일을 분담해서 하니 작업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지인은 도라지 씨를 밭두둑에 흩뿌리고, 나는 씨앗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끔 납작한 삽 등으로 두둑을 다지듯 살살 두드렸던 것이다. 습도를 유지하기 위한 왕겨는 파종이 끝난 뒤 엷게 덮었는데 벌써 발아가 기다려진다. 씨앗은 진퇴(進退)를 모르는 사람과 달리 2주쯤 후에는 어김없이 싹을 틔울 것이다.
2017-04-1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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