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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죽은 자의 매장

[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죽은 자의 매장

입력 2017-04-13 01:12
업데이트 2017-04-13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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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지.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슈타른베르크 호수 너머로 소나기를 뿌리더니

갑자기 여름이 왔지요, 우리는 주랑(柱廊)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동안 얘기했어요.

저는 러시아 사람이 아닙니다.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났지만

진짜 독일인입니다.

어려서 사촌인 대공(大公)의 집에 머물렀을 때

사촌이 썰매를 태워줬는데

겁이 났어요. 그는 말했지요, 마리,

마리, 꼭 잡아. 그리곤 아래로 내려갔어요.

산에 오면 자유로움을 느끼지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엔 남쪽으로 가지요.

(…)

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Summer surprised us coming over the Starnbergersee

With a shower of rain; We stopped in the colonnade,

And went on in sunlight, into the Hofgarten,

We drank coffee, and talked for an hour.

Bin gar keine Russin, stamm‘aus Litauen, echt deutsch.

And when we were children, staying at the archduke’s,

My cousin‘s, he took me out on a sled,

And I was frightened. He said, Marie,

Marie, hold on tight. And down we went.

In the mountains, there you feel free.

I read, much of the night, and go south in the winter.

-T S 엘리엇의 ‘황무지’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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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
최영미 시인
등단할 무렵에 시인이 되려는 자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T S 엘리엇(1888~1965)의 시를 찾아 읽었다. 황동규 선생님의 훌륭한 번역 덕분에 ‘황무지’가 그리 낯설지 않았다. 434행까지 이어지는 긴 시도 시작은 간단하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여기까지 읽고 나는 시인의 의도를 알아챘다) 아, 맞아. 바로 그거야. 해마다 봄이 되면 내가 느끼던 더러운 기분, 사람들은 봄이 왔다고 좋아하고 꽃구경한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나는 가슴이 아팠다. 처음 18행만으로도 ‘황무지’를 맛보기에 충분했다.

황무지라는 제목, 그리고 독자를 사로잡는 첫마디에서 오마르 하이얌의 사행시가 연상됐다. ‘새해가 되니 옛 욕망이 되살아나’ ‘황야도 천국이 되리’라고 노래했던 페르시아의 시인을 엘리엇도 알고 있었으리라. 슈타른베르크는 독일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호프가르텐은 뮌헨의 공원이다. 11행에 불쑥 튀어나오는 독일어 “저는…진짜 독일인입니다”라는 표현은 여행객의 입에서 나온 대화다. 시의 화자가 바뀌면 보통 집어넣는 연결어를 엘리엇은 생략했다. 그 결과 시는 난해해졌지만 긴장감은 높아졌다.

이런 해골복잡한 현대시도 외워지려나. 처음 몇 행을 외워봤는데 의외로 잘 외워졌다. ‘breeding’ ‘mixing’ ‘stirring’ 그리고 한 줄 건너 ‘covering’ ‘feeding’으로 끝나는 각운이 있기 때문이다.

8행부터 어조가 바뀌고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8행부터 18행까지는 휴가지에서 사교계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무의미한 말들이다. 시인의 고도로 절제된 시어를 음미하다가, 8행부터 앞뒤 맥락 없이 대화체의 확 풀어진 산문이 나오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시의 중간에 아무 관계없는 말들을 삽입하는 것은, 운문에서 산문으로의 이행만큼이나 신선한 놀라움이었으리. 지금은 이보다 난해한 시들이 수두룩해 별 놀랄 일도 아니나, 1920년대에는 세련된 독자들도 익숙하지 않은 짜깁기였다. 다양한 시점에서 형태를 분석한 입체파의 그림처럼, 엘리엇은 시에 콜라주 수법을 도입했다. 시간과 공간도 다르고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말들, 다른 언어, 다른 목소리들을 짜 맞추어 한 편의 시를 구성한다는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왔을까.

1888년 미국의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나 18살 때까지 촌구석 미주리주에서 보내고, 하버드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유럽으로 건너간 엘리엇. 파리에서 피카소 일당의 아리송한 현대미술을 목격하고 그가 받은 충격이 ‘황무지’에 녹아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런던에 정착해 영국 여자와 결혼하고 로이드 은행에서 근무하며 시를 썼던 건실한 미국 청년이 아방가르드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시인이 됐다.

다른 목소리가 등장하는 8행을 ‘summe’로 시작하고, 전체의 통일성을 위해 (그리고 리듬을 살리기 위해) 바로 뒤에 ‘ing’로 끝나는 ‘coming’을 배치한 시적 전략에 나는 감탄했다. 1922년 영국에서 출판된 시집 ‘황무지’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For Ezra Pound il miglior fabbro)

원래 시의 초고는 더 길었는데, 에즈라 파운드가 절반 정도의 분량을 잘라내어 ‘황무지’가 탄생했다니. 자신의 야심작을 파운드에게 바칠 만하다.
2017-04-13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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