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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 25주년] “한국, 美·中과 평등 관계돼야 운신 폭 커져”

[한·중 수교 25주년] “한국, 美·中과 평등 관계돼야 운신 폭 커져”

이창구 기자
이창구 기자
입력 2017-08-21 20:32
업데이트 2017-08-21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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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초기 中인민일보 서울특파원 지낸 왕린창

“한국을 마냥 높게 평가하던 중국인의 시선이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엔 한국을 꼭 필요한 이웃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친하게 지내면 좋지만 억지로 친할 필요까지는 없는 국가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중 수교 초기 인민일보 서울 특파원을 지낸 원로 언론인 왕린창(王林昌·73)은 한·중 사이에 파인 갈등의 골을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왕 기자는 1997년 3월~2002년 10월 인민일보 특파원으로 서울에서 근무했다. 퇴임 이후에도 인민일보와 자매지인 환구시보에 한반도 관련 논평을 자주 써 온 한반도 전문기자다. 지난 15일 왕 기자를 만나 25주년을 맞은 한·중 관계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한·중 수교 초기 인민일보 서울 특파원을 지낸 원로 언론인 왕린창이 지난 15일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25주년을 맞은 양국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왕 기자는 “양국 국민이 좀더 냉정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중 수교 초기 인민일보 서울 특파원을 지낸 원로 언론인 왕린창이 지난 15일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25주년을 맞은 양국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왕 기자는 “양국 국민이 좀더 냉정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요즘 중국인들은 한국을 어떻게 보나.

-수교 초기 중국인들은 한국을 동경했다. 모든 면에서 중국보다 한국이 낫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자존심을 구기면서까지 한국과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예전에는 외국 관광 하면 한국을 떠올렸지만, 지금은 유럽을 생각한다.

→중국인의 패권주의가 너무 강해진 것 아닌가.

-대국의식이 과도하게 팽창하는 것은 문제다. 시민의식 수준을 비교하면 중국이 여전히 뒤처져 있다. 양국 국민 모두 서로를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큰 것 같다.

→사드 갈등을 거치며 양국 국민의 감정이 격화된 측면이 있다.

-너무 극단적으로 흐르고 있다. 한국 언론의 중국 관련 기사 댓글을 보면 기사 내용과 상관없이 ‘중국이 만악의 근원’으로 묘사되고 있다. 중국 누리꾼도 한국을 욕하는 건 마찬가지다.

→자산으로서의 한국 가치가 효용을 다한 것인가.

-국가 관계는 자산 관계가 아니다. 독립국으로서 서로 평등하고 경쟁적인 관계를 맺으면 된다. 한국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미국과도 평등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래야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안보 측면에서 한국이 미국 쪽으로 쏠리는 게 좋지 않듯 경제에서는 과도한 중국 의존을 탈피해야 한다.

→중국에서 인민일보의 위상은 어느 정도인가.

-기층 당원에서 시진핑 주석까지 매일 아침 정독하는 신문이다. 당 기관지인 만큼 중국 공산당 노선과 정부 정책을 가장 정확하게 보도한다. 다만 요즘 일반 국민들은 별로 읽지 않는다. 종이신문의 위기를 인민일보도 겪고 있기 때문에 모바일 독자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시 주석이 직접 인민일보에 글을 쓰는 경우도 있나.

-마오쩌둥은 사설을 직접 쓰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총편집(장관급)이 당 선전부와 상의해 편집 방향을 결정한다. 기자들이 송고한 기사는 편집부에서 보도 여부를 결정한다.

→일선 취재기자들의 언론 자유가 너무 제한된 것 아닌가.

-당과 편집부가 일일이 지시하지는 않는다. 인민일보 기자들은 당과 당원의 가교로서 책임감이 매우 강하다. 한 문장을 쓰더라도 정치적 책무를 느낀다. 돈벌이용 기사는 절대 쓰지 않는다. 중국 언론에 비판적인 내용이 별로 없는 것은 ‘긍정적인 것은 널리 알리고 부정적인 것은 안에서 해결하자’는 중국 공산당 특유의 언론관 때문이다. 비판은 언론 보도가 아닌 회의에서 이뤄진다.

→한반도 전문기자가 된 계기는 무엇인가.

-1964년 헤이룽장대학 재학 때 국비 장학생으로 뽑혀 김일성종합대학에 유학을 갔다. 당시에는 북한이 중국보다 잘 살아 평양이 각광받는 유학 도시였다.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 1세대들이 대부분 김일성대 동문일 정도다. 대학 졸업 후 철도 공무원이 됐다. ‘조선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북·중 접경인 투먼에서 화물 인수 업무를 맡았다. 1990년 인민일보에 한국 담당 기자로 특채됐다. 인민일보는 1994년부터 서울에 특파원을 파견했는데, 내가 2대 특파원이다.
왕린창 기자가 서울 특파원 시절 보도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터뷰 기사. 김 전 대통령 취임일인 1998년 2월 25일에 인민일보 1면에 실렸다.
왕린창 기자가 서울 특파원 시절 보도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터뷰 기사. 김 전 대통령 취임일인 1998년 2월 25일에 인민일보 1면에 실렸다.
→어떤 취재가 기억에 남나.

-한국 외환위기 시절 금모으기 운동이 가장 인상 깊다. 1998년 2월 초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이었을 때 단독 인터뷰를 한 것도 잊을 수 없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으로 고통받을 때 인민일보가 큰 힘이 됐다’며 인터뷰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인터뷰 기사는 김 전 대통령 취임식이었던 2월 25일에 인민일보 1면에 나갔다. 김 전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경제개혁, 남북대화, 한·중 관계를 강조했다.

→2000년 마늘 파동도 취재했나.

-한국이 중국산 마늘에 대해 관세를 높이자 중국은 즉각 한국 휴대전화 수입 금지 조치를 취했다. 긴장감 속에서 한국의 동향을 보도했다. 그러나 지금의 사드 갈등보다는 훨씬 낙관적이었다. 사드는 무역 분쟁이 아니라 안보 분쟁이기 때문에 풀기가 훨씬 어렵다. 양국 국민의 애국심이 과도하게 투영됐다.

글 사진 베이징 이창구 특파원

window2@seoul.co.kr
2017-08-22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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