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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의 시골살이] 여물어 간다는 것

[고진하의 시골살이] 여물어 간다는 것

입력 2017-10-16 21:38
업데이트 2017-10-16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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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들이 사위어 가는 산골 농로. 앞서 걷는 사람 기척에 포르르 날아 벼 포기 사이로 숨는 메뚜기들. 낮은 산자락마다 소담스레 피어난 노란 감국들. 농로에 저절로 떨어져 나뒹구는 작은 산밤들. 기력이 떨어진 촌로들인 양 붉은 내복을 입고 선선한 가을바람에 두 팔을 흔들어 대는 허수아비들. 메뚜기를 날리며 앞서 걷던 아내는 문득 성악가 김동규가 부른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흥얼거린다.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사랑은 가득한 걸/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람은 죄가 될 테니까.” 그래, 하늘은 맑고 푸른 가을날 무슨 바람이 더 있겠는가. 어느 인디언 시인이 ‘죽기 좋은 날’이라고 했듯이 이 좋은 날 무슨 소원이 더 있겠는가. 메뚜기 떼 날리며 농로를 걷던 우리는 말라 가는 풀들이 덮인 논둑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앞엔 고개 숙인 벼 이삭을 품은 다랑논이 펼쳐져 있다. 고개 숙인 벼 이삭을 바라보던 아내가 입을 뗀다. “가을빛은 참 선한 것 같아요.” 나도 입을 열어 대꾸한다. “벼 잎들도 노랗게 물들고 있지만, 빳빳하던 벼 이삭이 익어 고개를 숙이고 있기 때문일 테죠.” 아내가 다시 입을 뗀다. “여물어 가는 것들의 빛은 다 선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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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물어 가는 것들의 빛이라. 오, 이 여인이 두메의 아낙이 되어 자족을 노래하며 살더니 저 소멸의 빛을 ‘여물어 가는 것들의 빛’으로 읽는 눈을 얻었구나. “강산과 풍월(風月)은 본래 일정한 주인이 없고 오직 한가로운 사람이 주인”(허균, ‘숨어 사는 즐거움’)이라 했는데, 그 한가의 경지에 든 것일까. 하지만 두고 볼 일이다. 두메 아낙과 손잡고 사는 동안 숱하게 엎어지고 자빠지며 여기까지 왔으니. 다만 저 고개 숙인 벼 이삭이 보여 주는 선한 빛을 안으로 잘 갈무리하고 살아야 한다는 다짐은 매일같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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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 시인
고진하 시인
우리가 걷던 농로 옆으로는 논에 물을 대는 수로가 있다. 이제 곧 벼를 수확할 논들은 물꼬를 다 틀어막았지만, 수로에는 콸콸콸콸 맑은 물이 세차게 흐른다. 벼를 자라게 하고 여물게 한 물. 한참 흐르는 물을 보고 있자니 얼마 전에 읽은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물, 너는 생명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다. 너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우리 가슴속 깊이 사무치게 한다. 너와 더불어 우리 안에는 우리가 단념했던 모든 권리가 다시 돌아온다. 네 은혜로 우리 안에는 말라붙었던 마음의 샘들이 다시 솟아난다.” 그렇다. 우리를 살게 하고 말라붙었던 내면의 샘을 다시 솟아나게 하는 건 은혜다. 무릇 은혜란 내가 도모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거저 주어지는 것. 이 생명 위기의 시대에 메뚜기들처럼 살아 있는 것들의 현존에 위안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은혜가 아닐 건가. 메뚜기, 감국, 산밤 등 내 노력과 수고 없이 내 곁에 있어 내 삶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 또한 하늘의 은혜가 아닐 건가.

은혜, 은총, 이런 말들은 현대인에겐 낯설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길든 현대인들에겐 낯설다. 나는 이런 말들을 종교적인 언어로 환원하고 싶지 않다. 하여간 이런 사고방식에 길든 이들은 더이상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다. 모름지기 인간이 잘 여물어 간다는 건 생의 무한한 신비와 모름을 긍정하는 것이고, 눈앞에서 날아오르는 메뚜기 같은 미물의 생조차 경이로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다. 메뚜기들이 내 앞에서 뛰어오르지 않으면 나의 현존도 불가능하니까. 노란 감국의 꽃향기를 흠향할 수 없다면 내 삶의 정원도 ‘사랑의 사막’으로 변하고 말 테니까.

나는 농로 끝자락에서 감국 몇 송이를 꺾어 아내에게 건넸다. 평소 같으면 왜 꺾었느냐고 퉁아리를 주었겠지만, 아내는 내가 내민 감국을 흔쾌히 받아 안았다. 아내는 힝힝 코를 벌려 감국의 은은한 향기부터 맡았다. 나보다 냄새에 민감한 아내는 감국에 코를 댄 후 ‘천국의 향기’라고 말했다. 천국 하면 사람들은 피안을 떠올리기 일쑤지만, 천국을 인식하는 재료는 차 안에 있구나. 산골짝에서 아주 쉽게 구할 수 있는 감국, 그걸 보물인 양 안고 가는 저 환희에 찬 여인을 따라가면 나도 천국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2017-10-1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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