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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빈곤이 아니라 불평등이야

문제는 빈곤이 아니라 불평등이야

안동환 기자
안동환 기자
입력 2018-01-05 18:16
업데이트 2018-01-05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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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사다리/키스 페인 지음/이영아 옮김/와이즈베리/280쪽/1만 4800원
현재 상위 0.1% 소득은 머리 끝에 있고, 구두코 바깥 지점에 극빈층 20%가 존재한다. 구두코의 발가락 위 지점이 중간 소득이다. 미국 가구의 절반은 구두코 발가락 지점 아래에, 나머지 절반은 그 위에 존재한다. 거의 전체 인구가 발바닥 근처에 몰려 있다. 와이즈베리 제공
현재 상위 0.1% 소득은 머리 끝에 있고, 구두코 바깥 지점에 극빈층 20%가 존재한다. 구두코의 발가락 위 지점이 중간 소득이다. 미국 가구의 절반은 구두코 발가락 지점 아래에, 나머지 절반은 그 위에 존재한다. 거의 전체 인구가 발바닥 근처에 몰려 있다.
와이즈베리 제공
영화 ‘설국열차’의 메이슨(틸다 스윈턴) 총리는 “누구도 신발을 머리 위로 쓰진 않는다. 신발은 그러라고 만든 게 아니니까. 처음부터 자리는 정해져 있어. 나는 앞칸, 당신들은 꼬리칸. 자기 주제를 알고 자기 자리나 지켜!”라며 불평등한 체제를 옹호한다.

극단적인 계급사회를 은유하고 있는 이 영화는 현실과 큰 차이가 없다. 미국 하버드대 마이클 노턴 교수와 캐나다 토론토대 캐서린 드셀스 교수가 2016년 발표한 논문을 봐도 현실이 설국열차의 확장판이라는 심증을 굳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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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교수는 대형 항공사의 비행 기록 수백만건을 분석했다. 일등석부터 삼등석으로 좌석이 구분된 여객기는 1000회 비행당 기내 난동(욕설·폭행·기물 파손·승무원 지시불응)이 평균 1.58건인 반면 등급 구분 없이 삼등석(이코노미석)만 있는 경우 평균 0.14건에 그쳤다. 특히 기내 난동의 발생률은 이코노미석 승객들이 앞서 탑승한 일등석과 비즈니스석을 통과하는 구조에서 두 배 더 높았다. 일등석의 존재는 9.5시간 비행 지연과 같은 위험 효과로 여겨졌다.

비행기는 ‘지위 서열’이 물리적으로 구현된 계급사회의 축소판이다. 항공사들은 더 큰 수익을 얻기 위해 ‘의도적인 불평등’을 마케팅으로 활용한다. 같은 연구에서 스스로를 우월하게 여기는 심리가 강한 일등석 승객의 경우 난동을 일으킬 확률도 수직 상승했다. 2009년 난동을 피워 기내에서 쫓겨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전 부인 이바나 트럼프부터 국내 땅콩회항 사건, 라면 상무, 중견기업 오너 2세 만취 난동 등이 전형적 사례로 꼽힌다.
미국 백인 남성과 여성, 흑인 남성과 여성의 얼굴 특징을 합성해 만든 얼굴 사진. ‘두 사진 속 인물 중 누가 복지 수혜자로 보이느냐’고 묻는 심리 실험에서 다수의 참가자들은 눈이 움푹 꺼져 있고, 흑인으로 보이는 ‘흐릿한 얼굴’ 사진 속 인물을 수혜자로 꼽았다. 반면 비수혜자로는 눈과 얼굴 윤곽이 선명하고 백인으로 보이는 오른쪽 사진 속 인물을 지목했다. 와이즈베리 제공
미국 백인 남성과 여성, 흑인 남성과 여성의 얼굴 특징을 합성해 만든 얼굴 사진. ‘두 사진 속 인물 중 누가 복지 수혜자로 보이느냐’고 묻는 심리 실험에서 다수의 참가자들은 눈이 움푹 꺼져 있고, 흑인으로 보이는 ‘흐릿한 얼굴’ 사진 속 인물을 수혜자로 꼽았다. 반면 비수혜자로는 눈과 얼굴 윤곽이 선명하고 백인으로 보이는 오른쪽 사진 속 인물을 지목했다.
와이즈베리 제공
신간 ‘부러진 사다리’는 토마 피케티 등 경제학자들이 주목해 온 경제적 불평등 현상에서 나아가 불평등이 개인의 삶과 생각,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각도로 조명한다.

저자 키스 페인은 켄터키주 빈민가 출신으로 노스캐롤라이나대 심리학과 교수가 된 ‘개천에서 용 난’ 인물이다. 그는 성장기부터 자신이 경험한 불평등과 차별의 영향을 실험심리학을 통해 규명해 왔다. 특히 이 책을 통해 진짜 문제는 빈곤이 아니며, 불평등이 더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친다.

그건 저자가 천착해 온 ‘왜 가난하다는 느낌이 실제 가난만큼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 ‘상대적 빈곤감만으로도 가난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이다.

주머니 사정이 빡빡할수록 눈앞의 이익을 좇거나 무모한 결정을 하는 성향이 짙다는 건 상식적이다. 더 잃을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저 사람보다 가난하다’라는 주관적 느낌조차 무모한 위험을 감수하고 한 치 앞만 내다보는 행동 전략을 취하게 만든다는 건 놀라운 발견이다.

저자의 연구팀은 미국 50개 주 가운데 부와 지위의 차별이 심한 주일수록 구글의 키워드 검색어로 ‘복권’, ‘섹스’, ‘마약’, ‘단기 소액대출’, ‘사후 피임약’, ‘성병 검사’ 등의 특정 검색 건수가 훨씬 많다는 걸 발견했다. 다양한 실증 연구와 통계지표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살인, 폭력, 교육 저하, 유아 사망, 정신질환과 같은 사회문제들이 소득 자체보다는 소득 불평등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불평등은 반대 정당에 대한 적대감 비율을 높이며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인종적 편견을 강화해 사회적 갈등도 부추긴다는 증거도 제시한다. 저자는 “사회적 사다리의 꼭대기와 밑바닥이 서로 멀어질수록 더 분열된다. 이것이 바로 지난 수십년간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불평등 구조가 고착된 지역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특권의식이 더 강했고, 같은 지역의 중산층조차 거리낌 없이 비윤리적 행동을 하는 경향도 농후했다. 불평등은 삶의 방식을 결정하고, 가치관마저 바꾼다.

“사람들은 불평등과 빈곤을 자주 혼동하고, 불평등 감소라는 목표를 경제 성장 목표와 혼동한다. 부자가 되고 나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바보, 멍청이로 보이기 시작한다. 불평등을 조장하는 가장 큰 요인은 부자들의 부유함이다. 우리 인간들이 불평등 속에서 번영하기 위해서는 사다리를 개조하는 수밖에 없다. 당신은 사다리의 몇 번째 층에 서 있는가?”(키스 페인)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2018-01-0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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