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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교 교수 작가의 탄생] 기운 내라고, 자연처럼 살라고… 힘을 주는 詩

[김응교 교수 작가의 탄생] 기운 내라고, 자연처럼 살라고… 힘을 주는 詩

입력 2018-02-18 22:48
업데이트 2018-02-18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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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인 김수영 (하) 기운을 주라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강바람은 소리도 고웁다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달리아가 움직이지 않게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무성하는 채소밭가에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돌아오는 채소밭가에서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바람이 너를 마시기 전에

-‘채소밭가에서’ (1957)
시집 ‘달나라의 작란’ 가편집 원고로 남아 있는 ‘채소밭가에서’를 부인 김현경씨가 정서한 것. 시인은 늘 부인에게 두 편을 정서하게 해서 한 편은 보관하고 한 편은 출판사에 보냈다. 이영준 교수 제공
시집 ‘달나라의 작란’ 가편집 원고로 남아 있는 ‘채소밭가에서’를 부인 김현경씨가 정서한 것. 시인은 늘 부인에게 두 편을 정서하게 해서 한 편은 보관하고 한 편은 출판사에 보냈다.
이영준 교수 제공
살다 보면 너무 힘들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고 싶을 때가 많지요. 가장 힘들 때 어디서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1954년 부인 김현경과 다시 만난 김수영은 성북동 계곡과 가까운 셋방에서 살았습니다. 솔방울로 밥 지어 먹으며 행복하게 살다가 시끄러운 라디오 소음이 싫어서, 1955년 여름 지금의 마포구 구수동 서강대교 근처인 서강으로 이사 갑니다. 겨울에 쓸 남은 연탄도 트럭에 싣고, 1000평쯤 되는 벌판에 외로 있는 엉성한 양기와집 한 채로 이사 갑니다. 지금과 달리 시골이었던 그곳에서 맨 처음 산란용 닭인 레그혼을 11마리 사서 키우기 시작합니다. 닭이 알을 낳으면서 생각지 않은 재미도 있었고, 단무지를 만들 수 있는 긴 무를 키우면서 농촌을 배경으로 많은 시를 씁니다.

“우리집에도 어저께는 무씨를 뿌렸”고, “물을 뜨러 나온 아내의 얼굴은/어느 틈에 저렇게 검어졌는지”, “시골 동리 사람들의 얼굴을 닮아”(여름 아침 ) 갑니다. 농사하고 닭을 키우며 “땅속의 벌레”(봄밤 )를 그는 늘 벗 삼습니다. ‘채소밭 가에서’는 바로 이때 쓴 시입니다. 도시에서 기자로 지내던 사람이 닭똥과 흙냄새 범벅으로 지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겠죠. 그의 글에는 농촌 생활이 지겹고 단순하다는 짜증도 있습니다. 닭똥 냄새 맡으며 지칠 때,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온갖 배추며 무며 파의 잎새들이 그를 응원하는 손짓으로 보였을까요. 그는 가장 사소한 사물에게 “기운을 주라”는 호소를 주문처럼 반복하며 기원합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채소밭에서 기운을 달라고 기원했을까. 시는 살아가는 힘을 노래합니다. 절실한 기구를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며 반복하고 강조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거리에는 구걸하는 고아와 싸구려 분을 바르고 미군을 부르는 양색시, 한쪽 다리를 잃은 목발 짚은 상이h용사가 넘쳐났습니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고 진창과 절망만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상처 앞에서 김수영은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고 간구합니다. ‘기운’이란, 만물이 나고 자라는 힘의 근원을 뜻합니다. 김수영은 자신의 시가 힘을 주는 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살아가기 어려운 세월들이 부닥쳐 올 때마다 나는 피곤과 권태에 지쳐서 허술한 술집이나 기웃거렸다.

거기서 나눈 우정이며 현대의 정서며 그런 것들이 후일의 나의 노트에 담겨져 시가 되었다고 한다면 나의 시는 너무나 불우한 메타포의 단편(斷片)들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 그리운 건 평화이고 온 세계의 하늘과 항구마다 평화의 나팔소리가 빛나올 날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우리들의 오늘과 내일을 위하여 시는 과연 얼마만 한 믿음과 힘을 돋우어 줄 것인가.

- ‘시작 노트 ’ (1957)
시인의 작품 ‘만용에게’ 주인공의 졸업식. 오른쪽 두 번째 학사모 쓴 이가 만용으로 어렸을 때 전라도 담양에서 올라와 시인의 집에 기거하며 양계 등 집안일을 도왔다. 만용은 시인의 도움으로 야간 중고등학교, 야간 대학(국민대)까지 나왔다. 첫줄 왼쪽부터 부인 김현경씨, 김수영 시인 어머니, 뒷줄 왼쪽 두 번째가 김수영 시인.
시인의 작품 ‘만용에게’ 주인공의 졸업식. 오른쪽 두 번째 학사모 쓴 이가 만용으로 어렸을 때 전라도 담양에서 올라와 시인의 집에 기거하며 양계 등 집안일을 도왔다. 만용은 시인의 도움으로 야간 중고등학교, 야간 대학(국민대)까지 나왔다. 첫줄 왼쪽부터 부인 김현경씨, 김수영 시인 어머니, 뒷줄 왼쪽 두 번째가 김수영 시인.
너무 힘들어 때로 허술한 술집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의 시가 불우한 은유 조각이 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평화의 나팔소리가 빛나올 날을 가슴 졸이며”, “우리들의 내일을 위하여” 김수영은 시가 “믿음과 힘을 돋워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이 문제는 설움과 죽음을 극복하려 했던 그에게 늘 숙제였습니다.

“기운을 주라”는 문장은 처음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로 들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들으면 멈칫하지요. 그 사이에 의미를 증폭시키는 말이 들어갑니다. 시에서 세 번째로 “기운을 주라”는 말을 읽을 때는 무슨 뜻인지 궁금해집니다. 타인에게 “기운을 주라”는 말일까요. “밥 좀 주라”는 말처럼 나에게 “기운을 주라”는 말일까요. 읽는 사람에 따라 달리 읽힐 겁니다. 같은 문장이지만 의미는 다양하게 증폭됩니다. 독자의 귀에 힘을 내라며 소곤대는 말이 점점 북소리처럼 커지는 겁니다.

반복도 그냥 반복이 아니라 병치(竝置) 반복입니다. 김수영의 시에는 병치 반복이 자주 나옵니다. ‘절망’에서도 병치 반복이 보입니다.

風景이 風景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速度가 速度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이 병치 반복되고 있지요. 그런데 ‘채소밭 가에서’는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가 주요 가사와 마치 주거니 받거니 하는 노동요 닮은꼴로 병치되어 있어요. 왜 병치 반복을 했을까요. 첫째,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한때 연극을 했던 김수영이 자주 쓰는 기법이지요. 둘째,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는 구절이 마치 밭고랑처럼 보이지는 않는지요. 채소가 심겨 있는 줄 사이사이에 있는 밭고랑 말입니다. 이렇게 시각적으로도 채소밭을 느낄 수 있는 시 형태입니다. 반복되는 구절은 설움과 절망에 빠지곤 했던 자기 자신에게 거는 주문이며 기도였습니다.

“강바람은 소리도 고웁다”는 구절은 독자를 강바람이 스쳐 지나는 강가 채소밭으로 데리고 갑니다. 실제로 김수영이 살던 집은 강가에 있었습니다. “이 시를 썼던 집에서 한강이 보였어요. 우리집 쪽으로 경사가 졌는데 홍수가 나면 물이 차서 철렁철렁했어요.” 부인 김씨의 말입니다. “무성하는 채소밭가에서” 그는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라 무성한 성찰도 합니다.

두 뙈기의 차밭 옆에는 역시 두 뙈기의

채소밭이 있다 김장 무나 배추를 심었을

인습적인 분가루를 칠한 밭 위에

나는 걸핏하면 개똥을 갖다 파묻는다

-‘반달’ (1963)

“두 뙈기의 차밭”은 집 뒤 150여평에 재배했던 잎이 예쁜 결명자 차밭을 말합니다. “인습적인 분가루”는 화학비료를 말합니다. 그게 싫어서 김수영은 밭에 “걸핏하면 개똥을 갖다 파묻습니다. 그의 시 정신인 “반역의 정신”(‘구름의 파수병’)은 그의 일상이기도 했습니다. 무성한 채소밭은 그에게 끊임없는 성찰을 주었습니다. “돌아오는 채소밭가에서”라고 썼듯이 내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채소밭이 나에게 돌아옵니다. 채소가 주체입니다. 아니면 내가 돌아오는 채소밭으로 읽을 수도 있지요. 이어 발표한 ‘파밭가에서’도 그가 농사를 지으며 끊임없이 힘을 얻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작품입니다.

“달리아가 움직이지 않게”에서 ‘달리아’는 성장할수록 꽃 구근이 둥글고 크며 무거운 꽃입니다. 줄기가 꽃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 때, 꽃대가 꺾이지 않도록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고 합니다. 부인 김씨는 “김수영 시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집 주변에 꽃밭을 만들곤 했어요. 달리아꽃도 그때 키웠고요. 잘 키우지 않으면 햇살 좋은 곳으로 옮겨 심어야 했어요. ‘움직이지 않게’는 그런 뜻이 아닐까요”라고 합니다.
선린상고 시절 까까머리 김수영(오른쪽). 옆에 앉은 친구 고광호는 김수영의 첫사랑 고인숙의 오빠이기도 하다.
선린상고 시절 까까머리 김수영(오른쪽). 옆에 앉은 친구 고광호는 김수영의 첫사랑 고인숙의 오빠이기도 하다.
외국에서 온 비싼 달리아꽃을 귀한 인간 존재로 비유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얼마나 귀한 존재일까요. 함부로 움직이지 않게, 쓰러지지 않게, 기운을 달라고 시인은 간구합니다. 달리아는 김수영 시인 자신을 상징하는 꽃일 수도 있습니다.

“바람이 너를 마시기 전에”는 무슨 뜻일까요.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소리도 고웁다”고 합니다. 지친 신체를 달래주는 고운 소리이기도 하지만, 그 소리가 점점 커지면 폭풍으로 불어 작물을 휩쓸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 ‘풀’(1968)에서도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고 합니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이 나를 마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바람이 상징하는 온갖 고통을 즐길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단독자로 단련시키면서도, 바람에 먹히면 안 됩니다. 그래야 “바람보다 먼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람보다 먼저 웃”을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고 했듯이, 가장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의 뿌리를 지켜내야 합니다. ‘바람’은 달리아 꽃대를 꺾을 수 있는 어떤 폭압이겠죠.

10여년간 양계를 하고 채소를 키우던 김수영의 경제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11마리였던 닭은 한때 1000마리까지 늘었습니다. 4·19 이후 폭등한 사료값을 감당하지 못해 몇백 마리를 팔아버립니다. 700마리 정도 남은 닭의 사료값을 대기 위해 시인은 밤새워 글을 쓰고 번역을 합니다.

양계와 농사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뼈저리게 체험한 김수영은 아내에게 “우리가 닭이나 채소가 아니라 사람을 저렇게 키웠다면 더 의미 있지 않았을까” 하고 묻기도 했답니다. 사실 시인은 집일을 거들던 소년 만용이를 키워 대학까지 졸업시켰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만용이의 학비를 직접 대며 부양했던 시인은 ‘만용에게’라는 시에서 가난한 생활의 고단함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김수영 시인의 초상화. 한 잡지에 실렸던 시인의 스케치를 지인이 유화로 변신시켰으나 마음에 안 들었던 부인 김씨가 다시 색을 덧입혀 화사하게 만들었다.
김수영 시인의 초상화. 한 잡지에 실렸던 시인의 스케치를 지인이 유화로 변신시켰으나 마음에 안 들었던 부인 김씨가 다시 색을 덧입혀 화사하게 만들었다.
생활이 어려웠지만 그는 자연을 그냥 묘사하기만 하거나 혹은 자연을 점령해야 할 대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자연에 “기운을 주라”며 대화하는 그 자신 또한 누리의 한 부분으로 살았습니다. 그의 시는 절대자유, 절대사랑 그리고 절대자연에 서 있었습니다.

자연이 하라는 대로 나는 할 뿐이다

그리고 자연이 느끼라는 대로 느끼고

나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 ‘사치 ’ (1958)

그는 자연에 귀를 대고 들으라고 합니다. 자연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합니다. 자연이 느끼라는 대로 느끼겠다고 합니다. 가장 지쳤을 때,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포기했을 때, 그는 “서둘지 말라”(봄밤)고 위로합니다. 여린 새싹인 우리에게 얼어붙은 땅을 뚫고 봄을 끌어오는 자연처럼 살라며 그는 우리에게 권합니다.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

시인·숙명여대 교수
2018-02-19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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