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찢고 나온 ‘이상형 여인’

김동인은 우리에게 문학 교과서에 실린 소설 ‘배따라기’, ‘감자’, ‘광염 소나타’ 등을 쓴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반면 그의 창작 방법론은 우리에게 덜 알려졌는데, 그것이 이름하여 ‘인형 조종술’이다. 김동인은 이렇게 주장했다. (소설을 쓰는) 예술가란 무릇 하나의 세상을 창조해, 자기 손바닥 위에서 뜻대로 놀릴 만한 역량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소설 속 캐릭터는 소설가의 한낱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에 관해 영화 ‘루비 스팍스’는 사랑을 테마로 반론을 제기한다. 이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려면, 우선 이 작품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루비 스팍스’의 주인공은 소설가 캘빈(폴 다노)이다. 열아홉 살 때 출간한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이른바 ‘천재 작가’로 불리며 유명세를 누리지만, 그의 인생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집필 작업은 슬럼프에 빠졌고 긴 연애도 종지부를 찍었다. 마음을 추스르기가 힘든 캘빈은 정기적으로 심리 상담을 받고 있는 상태다. 한데 그즈음 그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꿈에 한 여자가 자꾸 나타나는 것이다. 그녀가 계속 눈에 밟히던 캘빈은 아예 꿈에 나오는 여자를 모델로 삼아 소설을 쓰기로 한다. 장르는 로맨스. 그녀의 상대는 캘빈 자신이다. 그는 이상형의 면모를 불어넣은 그녀의 이름을 루비 스팍스로 짓는다.

이후 놀라운 사건이 발생한다. 캘빈이 허구화한 루비(조 카잔)가 실제 연인으로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소설은 진짜 현실이 됐다. 심지어 캘빈에게는 종이에 몇 문장만 써도 루비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힘도 생겼다. 김동인이 주창한 인형 조종술처럼, 작품의 캐릭터인 그녀를 작가로서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사실 입 밖에 내지 않아서 그렇지, 파트너를 내가 원하는 대로 다루고 싶다는 상상 다들 한 번쯤 해봤을 듯싶다. 그 소망을 이룬 캘빈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많을 테다. 그렇지만 ‘루비 스팍스’는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는 진실을 제시한다. 애인을 제멋대로 부리는 마법의 실체가 실은 사랑을 파탄 내는 저주라는 명제다.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왜냐하면 사랑의 속성 자체가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 사랑은 둘이 합쳐 하나가 되는 동일성이 아니라 둘이 함께 있되 하나가 되지 않는 차이의 원리에 기반을 둔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에 기우는 관계는 금방 깨지고 만다. 사랑을 지속하는 비결은 서로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지켜주는 데 있다. 소설가의 소설 쓰기 역시 일종의 관계 맺기라는 점에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위에서 김동인의 인형 조종술을 언급했다. 그러나 정작 그는 본인 소설의 캐릭터를 통제하지 못했다. 훗날 김동인은 회고한다. 등장인물들이 의지를 가진 존재인 양, 작가의 의도를 배반했다고. 캘빈은 루비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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