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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사회면] “쌀 말고는 다 훔쳐 썼어요”

[그때의 사회면] “쌀 말고는 다 훔쳐 썼어요”

손성진 기자
입력 2018-10-14 22:40
업데이트 2018-10-14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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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치기 수법을 다룬 기사(동아일보 1975년 6월 17일자).
소매치기 수법을 다룬 기사(동아일보 1975년 6월 17일자).
78세 할머니 소매치기가 경기도 일산에서 붙잡혔다. 현금을 적게 갖고 다니고 지하철이나 버스의 혼잡도가 완화되면서 확실히 소매치기는 줄어든 것 같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소매치기에게 당할까봐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큰돈은 전대에 넣어 몸에 감거나 팬티 속에 주머니를 만들어 숨겼다. 1965년에 전국에 3300여명의 소매치기가 있었다는 검찰 통계가 있다.

소매치기패는 ‘왕초’를 두고 상경 소년들을 납치해 사나흘 훈련시켜 소매치기를 강요했다. 훈련을 마치면 서울 장충공원 등 혼잡한 곳으로 가서 실습을 시켜 합격하면 여자 핸드백 여는 법부터 가르쳤다(동아일보 1975년 6월 24일자). 1981년 검찰은 소매치기계의 ‘세계 4대 기술자’ 중 3명을 검거했다. 그 별명은 워낙 기술이 좋아 동료들이 붙여 준 것이라고 한다. 찰나의 순간에 지갑을 꺼내 돈만 빼내고 지갑은 도로 주머니에 넣어 줄 정도의 기술이었다.

그중에 두목 유모씨는 아파트 3채와 외제차, 과수원에 첩 두 명까지 두고 있었다(경향신문 1980년 11월 25일자). 넷 가운데 나머지 한 명은 ‘손을 씻고’ 번 돈으로 부산에서 여관업을 하고 있었다.

소매치기 수법은 다양하다. ‘안창따기’(면도칼로 안주머니를 째는 것)는 바람잡이가 대상자를 밀치고 가릴 때 한다. ‘짱채기’는 손목시계를 낚아채는 것이다. 여자의 목걸이를 채 가는 굴레따기 수법은 이렇다. 바람잡이가 동전을 일부러 떨어뜨려 줍는 척하며 여자의 치부를 건드리면 여자가 놀라 고개를 숙이고 그 순간 목걸이는 이미 소매치기의 손안에 있다. ‘똥빵채기’는 뒷주머니 털기다. 치기배와 정보원, 경찰은 서로 어쩔 수 없이 연결돼 있었는데 각각 ‘회사원’, ‘야당’, ‘여당’이라는 은어로 불렀다고 한다. 1975년에는 소매치기에게 상납받은 경찰관 130여명이 해직되는 비리도 터졌다.

1981년 1월 검찰이 소매치기 10개파 21명을 붙잡아 구속했는데 4자매와 올케가 한 팀을 이룬 ‘오자매파’가 있었고 ‘잉꼬부부파’, 형부와 쌍둥이 자매가 힘을 합친 ‘쌍둥이파’도 있었다. 특히 오자매파의 가족 관계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첫째는 남편이 대학에 다닐 때부터 학비를 대주어 남편은 해운회사 임원이었고 재산이 당시 시세로 15억원대였다. 다른 자매들의 남편들도 학원 이사장, 국제미술협회 이사, 프로 골퍼라는 버젓한 직업을 갖고 있었고 고급 승용차를 소유하고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은 “쌀과 연탄만 돈 주고 샀지 나머지 생필품은 모두 훔쳐 썼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81년 1월 14일자).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2018-10-1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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