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서 사죄해야 한다” 日할머니의 ‘마지막 여행’

입력 : ㅣ 수정 : 2019-08-14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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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함흥서 태어난 에다 할머니
올 3·1절 100주년 서대문형무소 방문
“고통받고 죽어 간 곳” 휠체어서 내려
소녀상 만난 뒤 귀국 10일 만에 별세
에다 유타카 할머니가 지난 3월 4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찾아 소녀상의 손을 어루만지고 있다. 할머니는 이날 오후 비행기편으로 일본에 돌아갔고, 10일 후인 14일 세상을 떠났다. 에다 다쿠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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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다 유타카 할머니가 지난 3월 4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찾아 소녀상의 손을 어루만지고 있다. 할머니는 이날 오후 비행기편으로 일본에 돌아갔고, 10일 후인 14일 세상을 떠났다.
에다 다쿠오 제공

한국에 대한 ‘가해의 역사’ 앞에 일본은 진심 어린 사죄를 해야 한다고 늘 말해 온 일본 할머니가 올 3·1절 100주년을 맞아 ‘생애 마지막 여행’을 서울에서 한 뒤 조용히 눈을 감은 사실이 알려졌다. 최후의 여행에서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옛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과의 만남이었다. 할머니는 자신을 화장한 뒤 어릴 적 살던 북한 압록강변에 산골(散骨)해 달라고 유언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에 거주해 온 에다 유타카 할머니. 1928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일본 군인의 딸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취학 직전 일본에 돌아갔던 에다 할머니는 올해 3·1절 한국을 방문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낸 뒤 10일 만에 세상을 떴다.

14일 장남 에다 다쿠오(64)에 따르면 할머니는 올해 3·1절을 앞두고 아들에게 “죽기 전에 나를 한국에 꼭 좀 데려가 달라”고 생의 마지막 부탁을 했다. 연로해지면서 심장병, 폐렴에 한랭응집소증이란 희귀병까지 나타난 90대 어르신을 모시고 비행기를 타는 게 겁이 났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할머니는 어릴 적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임종 때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순남이’라는 조선인 식모가 나를 정말 예뻐해 주었는데, 우리 어머니는 순남이를 얼마나 괴롭히셨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그게 마음에 걸려서 남북이 통일되면 꼭 순남이랑 살던 동네에 가서 용서를 빌려고 했지.”

할머니는 평소 1919년 3·1운동이 같은 해 중국 5·4운동의 산파 역할을 하는 등 제국주의에 맞선 아시아 독립운동의 뿌리라는 생각을 확고히 갖고 있었다. 한반도에 대한 애착에 더해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결과였다. 졸업 후 할머니는 일본 민속학의 태두인 미야모토 쓰네이치의 밑에서 민중생활사를 연구했다. 위안부 피해를 다루는 단체 일본의전쟁책임자료센터 회원으로도 꾸준히 활동했다. 이 단체는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조사자료를 일본 정부에 제출하고 ‘일본의 군 위안부 연구’ 등을 펴낸 곳이다. 그러면서 야간고교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일본의 조선 침략을 알리고 전쟁의 참화를 일깨우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할머니는 지난해 3차례에 걸친 남북 정상회담에 큰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나뉜 것은 일본 때문”이라는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지난 2월 28일 휠체어를 타고 서울에 온 할머니는 3월 1일 광화문 기념행사에서 온 힘으로 태극기를 흔들었고, 2일에는 임진각 망배단을 찾아 남북 통일을 기원했다. 경건한 마음가짐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3일 서대문형무소에 갔을 때 할머니는 갑자기 휠체어에서 내리게 해 달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어간 이곳을 내가 앉아 갈 수는 없다”며 몸을 세웠다.

한국에서 마지막 날인 4일 할머니는 위안부 소녀상 앞에 데려다 달라고 청했고, 비슷한 또래였을 소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귀국 비행기를 탔다. 마지막 바람을 다 이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할머니는 도착 사흘째인 6일부터 병상에 누웠고, 14일 운명했다.

장남은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최후의 말은 ‘반자이’(‘만세’의 일본 발음)였다”면서 “마지막으로 3·1운동의 외침을 머릿속에 간직하며 돌아가신 것 같다”고 말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2019-08-15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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