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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장] 그들은 왜 폭도가 됐나/김상연 논설위원

[서울광장] 그들은 왜 폭도가 됐나/김상연 논설위원

김상연 기자
김상연 기자
입력 2021-01-21 20:36
업데이트 2021-01-22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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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연 논설위원
김상연 논설위원
제이슨 크로 미국 민주당 연방하원의원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전장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참전용사 출신이다. 그는 지난 6일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연방의회 의사당에 난입했을 때 의원으로서 현장에 있었다.

회의 도중 총격전이 벌어지려 하자 말쑥한 양복 차림의 크로 의원은 의자 밑으로 황급히 몸을 낮추고 대피했는데, 당시 사진을 보면 포탄이 빗발치는 참호 속을 포복하는 군인의 모습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그는 미국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수도 한복판의 의회 안에서 전쟁터와 같은 상황을 맞게 될 줄은 한 번도 상상치 못했다”고 털어놨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CNN 역시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CNN은 1990년 걸프전쟁 때부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이역만리 중동의 전투를 실시간으로 영화처럼 볼 수 있게 해 주는 CNN의 보도는 시청자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랬던 CNN이 몇십 년 뒤 자국 의사당 안에서 벌어진 난리를 마치 중동 전쟁처럼 생중계하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뉴스 전문 채널은 사회에 큰 변고가 없으면 시청률이 떨어지는 속성이 있다. 전쟁 뉴스가 시들해지면서 CNN은 후발 뉴스 채널인 폭스뉴스와 MSNBC에 밀려 고전하기 시작했다. 폭스뉴스는 보수색을 확실히 했고 MSNBC는 진보색을 뚜렷이 했다. 뚜렷한 이념적 지향이 없었던(원래는 이게 제대로 된 언론이다) CNN은 시청자들을 좌우의 강경 매체에 빼앗기고 위기에 처한 셈이 됐다.

그러자 CNN은 ‘중도’를 버리고 ‘진보’로 변신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급기야 2016년 대선 때 트럼프 공화당 후보 진영은 CNN이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노골적으로 편든다며 “CNN은 ‘클린턴 뉴스 네트워크’(Clinton News Network)의 약자”라고 비꼬았다. 이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클린턴 국무장관이 폭스뉴스에 대해 “언론이 아니다”라고 비난했던 것을 연상시켰다. CNN은 트럼프 정권 내내 대통령과 충돌했고, 이번 대선을 전후해서도 트럼프에 비판적인 보도를 집중적으로 내보냈다. 그 덕분인지 지난해 대선(11월 3일) 직후 CNN의 시청률이 19년 만에 처음으로 폭스뉴스를 누르고 1위에 올랐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언론이 갈수록 좌우로 양분되는 추세는 한국도 다르지 않다. 어떤 신문은 1면부터 마지막면까지 비판인지 저주인지 모를 기사와 논평으로 도배하고, 이미 저주에 중독된 독자들은 정파성이 강한 보도일 수록 열광하며 ‘좋아요’ 세례를 퍼붓는다. 요즘엔 유튜브 같은 ‘유사 언론’까지 가세하면서 정파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여기엔 수지맞는 계산법이 숨어 있다. 대한민국 인구 5000여만 명 중 30%가 보수, 30%가 진보라고 할 때 10대 이하 미성년자를 빼고 계산해도 언론이 어느 한쪽 이념을 분명히 하면 1000만명 이상의 충성 구독자를 확보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구독자 수는 돈과 직결돼 있다. 지난해 유튜버 슈퍼챗 후원금 순위에서 상위 5개 채널 중 4개가 정치 관련 유튜버였는데, 그들 모두 진영 논리가 선명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심지어 군대에 가지 않아 ‘국민 밉상’으로 찍힌 유승준(스티브 유)씨마저도 이런 ‘분열 비즈니스’에 눈을 뜬 듯하다. 유씨가 어떤 항변을 해도 꿈쩍 않던 여론이 최근 그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비판하는 영상을 올리자 지지자가 생기면서 후원 슈퍼챗이 쏟아진 것이다.

이런 분열의 참상들은 인공지능(AI)의 발달로 더욱 견고한 악순환의 고리를 완성했다. 영악한 알고리즘이 보고 싶은 뉴스만 보도록 온종일 안내하는 탓에 우리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은 갈수록 단단해지고 있다.

CNN 등 미국 언론은 의사당 난입 사태를 보도하면서 ‘어쩌다가 이 나라가 이렇게까지 망가졌나’ 하는 식의 한탄을 내놓고 있다. 그들은 원인을 트럼프 개인 한 명에게로만 돌린다. 그것은 언론의 책임을 외면하는 유체이탈 화법 같다. ‘의사당 난입 폭도’라는 괴물의 탄생에 트럼프는 방아쇠 역할만 했을 뿐이다. 그 뇌관을 차곡차곡 쌓은 것은 분열 비즈니스에 맛들인 언론과 유사 언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은 금리와 주가만 미국을 따라가는 게 아니다. 정치도 따라간다. 한국 언론이 지금이라도 분열 비즈니스와 결별하지 않는다면 우리 국회의원들이 의사당에서 양복 차림으로 포복하는 날이 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carlos@seoul.co.kr
2021-01-2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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