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업전야’ 주연 김동범씨

80년대 후반 노동운동 다룬 독립영화
새롭게 단장해 새달 1일 극장 개봉
실제 파업 노동자들과 찍으며 공감
또 다른 한수들 위해 연기하는 게 꿈
김동범씨
“최근 가슴 아픈 산재 사고들이 많았잖아요. ‘파업전야’(포스터)에서 다룬 내용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영화 ‘파업전야’
‘한국 독립영화의 전설’로 통하는 영화 ‘파업전야’가 다음달 1일 노동절을 맞아 극장 개봉한다. 영화 운동을 하는 청년들이 뭉쳐 노동 현장을 정면으로 다뤘던 이 작품은, 최루탄과 헬기까지 동원한 정부의 탄압 속에 극장 상영이 막혔으나 대학가 순회 상영으로 30여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1990년 당시 기준으로 톱5에 드는 흥행 성적이다. ‘파업전야’는 4K 디지털 및 음향·녹음 보강 작업을 거쳐 새로 태어나 지난해 말 독립영화제에서 관객과 다시 만났고, 극장 개봉으로 이어졌다.

1990년 초중반 대학을 다녔던 세대의 뇌리에는 멍키스패너를 번쩍 치켜든 깡마른 청년 노동자 한수를 클로즈업한 엔딩 장면과 뒤이어 흐르는 안치환의 주제가 ‘철의 노동자’가 강하게 남아 있다. 이제 얼굴과 몸매에 직선보다 곡선이 많아진 ‘중년의 한수’ 김동범(53)씨를 만났다. “지난해 작업 때 감독님들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저를 못 알아보더라고요. ‘형, 저예요. 한수’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던데요.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도 영화 포스터를 보고는 이런 아빠 어디 갔냐고, 다시 돌아가라고 하던데요. 하하하.”

그가 연기한 한수는 홀어머니 밑에서 동생을 공부시키느라 학업을 접고 공장 일을 하는 청년이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반장 승진 유혹에 민주노조를 세우려는 동료들을 애써 외면하며 철야와 잔업을 반복한다. 그러나 사측의 폭력에 동료들이 하나둘 쓰러져 나가자 결국 투쟁의 선봉에 서게 된다.

어려서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접한 어린이 뮤지컬 때문에 무대를 동경하게 됐다. 대학 시절에는 전공인 경영학보다 연극 동아리 활동에 흠뻑 빠졌고, 4학년 때 영화 동아리 선배 덕택에 ‘파업전야’와 연결됐다. “저는 못생긴 배우로 통했어요. 단역 정도 하겠구나 싶었는데 주연이라는 거예요.”

1989년 말 인천 부평의 폐업 공장에서 2주간 촬영하던 때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실제 파업 중인 노동자들과 함께 불 꺼진 공장에 전기를 연결해 가며 영화를 찍었다. 노동자들은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모두가 치열한 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친구를 돕는다는 생각에, 영화 해보려는 욕심에 함께한 경우도 있었지요. 하지만 촬영 막바지 한수가 공장 선배와 술잔을 나누며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장면을 찍으면서 배우와 스태프 모두 눈물을 흘리며 하나가 됐죠.”

‘파업전야’ 덕택에 또래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얼굴을 알아봐 ‘운동권 아이돌’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을 정도였지만 연기자의 삶은 길게 가지 못했다. 대학 졸업 뒤 고 박광정, 추상미 등과 극단을 만들어 대학로 무대에 섰다. 송강호, 김윤석 등과 연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극단은 경영난에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딱 2년 정도만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먹고 학원 일에 뛰어들었는데 세월은 20년 가까이 속절없이 흘렀다. 이따금 목마름을 느끼며 후배들의 연극을 지원하곤 했다. 2013년 즈음 갈증이 극에 달했을 때 대학 동문 연극회를 통해 무대와의 인연을 비로소 되살렸다.

그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한수들을 위한 연기를 하는 게 꿈이다. 문화창작집단 ‘날’에서 고문과 제작PD를 맡고 있는 그는 2014년 백혈병에 걸린 반도체 공장 노동자 이야기를 그린 연극 ‘반도체 소녀’에 출연했다. 영화 오디션에도 도전하고 있다.

“‘파업전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 그렇게 할 수 없더라고요. 열정이 부족해, 한편으로는 비겁해 물러선 적이 많았지만 이젠 앞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글 사진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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