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인사이드] 빛나는 졸업장 받았지만 돌아와선 백수 기러기

[주말 인사이드] 빛나는 졸업장 받았지만 돌아와선 백수 기러기

입력 2013-09-07 00:00
수정 2013-09-0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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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 아빠 기러기는 빈 둥지가 힘겨워

미국의 한 대학에서 학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김모(27·여)씨는 최근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10년 간 유학 생활을 마치고 지난해 6월 귀국했지만 앞날이 막막하다. 김씨는 “미국 경제가 침체되면서 유학생들이 현지 기업에 취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며 “한국 기업들이 미국 대학들을 돌며 채용 설명회를 하지만 불경기 여파로 채용 인원이 대폭 줄었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어 “대학원에 갈지 공기업 취직을 준비할지 정하지 못해 여전히 백수”라며 “유학을 했는데도 앞날이 불투명하다”고 털어놨다.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 유학생들 가운데 70% 이상이 부모의 권유로 목적 없이 유학을 떠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현지에서 취업이 안 돼 우왕좌왕하다가 백수 신세로 전락하거나, 진로를 결정하지 못해 탈선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결국 귀국하지만 취업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최근 중국에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부모들이 수억원을 들여 1990년대생인 어린 자녀들을 유학 보냈지만 일부 유학생들이 마약, 도박, 범죄 등에 빠지는 결과를 일컫는 ‘유학 쓰레기’(留學?)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다.

전 세계 유학생 수 4위인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불경기 여파와 중화권 유학생 증가 등으로 7~8년 새 1위에서 4위로 내려갔지만 유학생 규모는 18만 2300여명으로 여전히 많다. 미 이민세관단속국 산하 학생교환방문정보시스템의 유학생 현황에 따르면 한국 유학생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국가인 미국 내 어학연수 및 직업교육을 포함한 한국 유학생 수는 9만 1677명으로 중국과 인도에 이어 세 번째를 기록했다.

그러나 졸업 후 현지 취업은 ‘하늘의 별따기’다.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없어 체류 신분이 불안정하고 영어 구사능력이 떨어지는 아시아계 유학생들은 바늘구멍이 된 미국 채용시장에서 인기를 잃고 있다. 미 매사추세츠대학 경제학과 마를렌 김 교수는 “고용주들은 영주권만이 아닌 시민권자를 원하고 구직시장이 어려울 때는 인종이 불리한 요소”라고 전했다.

전 세계적으로 유학생을 유치해 해마다 210억 달러(약 23조 450억원)를 벌어들이는 미국은 최근 경제 위기로 교육 예산을 감축했다. 경영난에 직면한 미 대학들은 더 많은 등록금을 내고도 입학하려는 유학생들을 선호하게 됐다. 그 결과 캘리포니아주 명문 주립대학인 UC버클리대학교 내 아시아계 학생의 비율은 40%에 육박한다.

미국 내 대학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지난달 미국 내 가장 비싼 대학 학비가 처음으로 6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한국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것으로 알려진 뉴욕대학교는 5만 9337달러를 부과하고 있다. 미 대학들은 재정 보조와 장학금 혜택도 상당히 있지만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학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인 유학생들의 63% 정도가 가족의 지원을 받거나 스스로 벌어서 학비를 대는 실정이다. 그러나 졸업할 때까지 학비에 생활비까지 3억원 이상이 들어가지만 졸업장은 투자 비용 이상의 좋은 일자리를 가져다주지 않은 지 오래됐다.

현지 취업이 어려워지자 유학생들이 한국으로 귀국하는 ‘리턴’ 현상도 두드러지고 있다. 그러나 국내 경기도 이들을 수용하기에는 녹록지 않다. 통계청이 발표한 7월 고용 동향에 따르면 15~29세 청년층 실업률이 8.3%에 이른다. 대기업 인사담당자들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해외 대학 출신 구직자들이 넘쳐나는데다, 국내 대학 출신자들도 이제는 교환학생이나 어학연수 등으로 상당한 영어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유학생들이 전공 분야 등에서 실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면 굳이 그들을 뽑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국내 문화를 잘 아는 한국 대학 졸업생들을 선호하는 회사들도 많다. 이러다 보니 한국에서 연봉 3000만~4000만원대 일자리 찾기 경쟁에서 국내 대학 졸업자에게 밀리는 유학생들이 수두룩하다. 미 취업 전문 사이트 ‘워킹유에스닷컴’에 따르면 경영전문대학원(MBA) 과정을 마쳐도 구직에 성공하는 유학생은 손에 꼽는다.

유학 후 현실이 이렇게 암울하지만 한국에서 수억원을 들여 대학 졸업장을 따기 위해 자녀를 유학 보낸 가족이 115만 가구가 넘는다. 통계청에 따르면 유학 간 자녀와 부인과 떨어져 사는 ‘기러기 아빠’들이 50만명에 육박한다. 이들 가운데 77%는 영양 불균형, 30%는 우울 증세에 시달린다. 지난 7월 5일에는 대구에 사는 한 기러기 아빠가 딸의 유학 문제를 고민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기러기 아빠의 힘든 삶이 가족 해체의 위기를 불러온 것이다. 지난 5월에는 정치권에서 ‘가정의 달’을 맞아 기러기 가족 문제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는 기러기 아빠들의 장기간 독거생활이 야기하는 건강 문제 등이 심각하게 논의됐다. 특히 가족들에게 한 달 봉급의 70% 이상을 송금하면서도 기러기 아빠들이 오랜만에 만나는 자녀와 아내로부터 환대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들의 외로움을 심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 중학교 시절 남동생과 함께 캐나다로 유학을 떠난 이모(26·여)씨는 기러기 가족 생활 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영어 실력도 어느 정도 갖춘 상태에서 유학길에 올랐지만 어린 나이에 외지 생활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씨가 현지에서 만난 다른 유학생들 상당수도 현지 생활을 힘들어하며 “하루빨리 좋은 대학 졸업장을 갖고 한국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평생 살 것도 아닌데 이 고생을 왜 하나 하는 회의감에 빠졌었다”며 “결정적으로 몇 개월만에 한 번씩 보는 아버지가 우리를 너무 많이 걱정하고 본인도 힘드시니 잔소리를 많이 하셨고, 결국 크게 다퉜다”고 말했다. 유학 전에는 화목한 가정으로 손꼽혔던 이씨 가족은 오랜 회의 끝에 다시 온 가족이 한국에 모여살기로 결정했다. 이씨의 아버지는 가족을 캐나다로 보낸 후 45평짜리 아파트를 27평으로 옮겨 혼자 살았으며, 그리운 가족 생각에 당시 자신이 운영하던 건설업체 경영에도 소홀해졌다고 했다. 평소 싸워본 적이 없었던 아내와 화를 내며 다투기도 일쑤였다.

다시 한국행을 결정하며 이씨의 기러기 가족 생활은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 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면서도 “다만 유학을 보내기 전부터 가족들 간에 이것이 최선인가를 정말 많이 고심하고 의논해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학의 필요성에 대해 자녀와 충분히 상의하고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은 물론, 가족들 간에도 더 많은 배려와 이해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2013-09-07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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