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횡포’ 고발·비난 봇물 속 甲은 ‘몸 사리기’”왜곡된 갑을 구조·법 개선하는 성과 거둬야”
“을(乙)의 반격이 시작됐다.”대기업 상무의 라면을 빌미로 한 승무원 폭행, 베이커리 업체 회장의 지갑 이용 호텔 직원 폭행에 이어 남양유업 영업직원의 막말 사건 등 비뚤어진 ‘갑을(甲乙) 관계’의 폐해가 잇따르자 ‘을’들이 참아왔던 울분을 토해내고 있다.
인터넷 게시판과 SNS에는 ‘갑의 횡포’를 고발하고 비난하는 글이 연일 폭주하고 해당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이 가시화하는 등 파문이 확산하는 모양새다.
”이번 기회에 갑에게도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울분 어린 목소리에서 ‘특정 개인·기업 죽이기’ 식의 비난보다는 비뚤어진 ‘갑을 문화’와 왜곡된 영업 관행 등을 바로잡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논란이 뜨겁다.
◇ ‘甲 횡포’ 고발·비난 봇물…甲은 ‘몸 사리기’ =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와 이종걸 의원 등은 7일 국회에서 ‘재벌·대기업의 불공정·횡포 피해사례 발표회’를 열어 그동안 묻혀 있던 피해자들의 생생한 사례를 소개했다.
이 자리에서는 “자식뻘인 영업 담당에게 욕설과 협박, 갈취에 시달려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서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거나 “명절 때마다 떡값과 지점 회식비 등 각종 명목의 돈을 요구받았다”는 등 남양유업 대리점 주인들의 증언이 쏟아졌다.
CJ 대한통운이 일부 지역에서 화물운송기사를 상대로 수수료 폭리를 취했다는 주장과 크라운베이커리가 주문제도를 일방적으로 변경해 가맹점에 손해를 끼쳤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사례 발표회의 증언을 소개한 기사에는 ‘갑의 횡포’를 비난하는 댓글이 적게는 수십개에서 많게는 수백 개씩 달렸고 누리꾼들은 해당 기사를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전파했다.
’남양유업 사태’ 닷새째인 이날도 인터넷 게시판 등에는 ‘을의 고통’을 호소하고 소개하는 글들이 계속 올라오며 불공정한 거래 관행을 비판하는 여론이 식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해당 업체에 대한 불매운동도 가시화하고 있다.
CU, GS25, 세븐일레븐, 바이더웨이 등 편의점주들의 모임인 전국편의점가맹점사업자단체협의회는 이날 “같은 ‘을’의 입장으로 비통함을 공감한다”며 남양유업 제품에 대한 판매중단을 선언했다.
회원수가 1만5천여명에 달하는 이 단체가 불매운동을 공식 선언한 만큼 남양유업이 받을 타격도 적지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칼을 뽑아들었다.
이미 남양유업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인 공정위는 이날 서울우유와 한국야쿠르트, 매일유업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 유업계의 ‘밀어내기’ 실태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불매운동이 시작되고 파문이 커지자 대기업들은 긴장하며 자사에 ‘불똥’이 튀지 않을까 봐 몸을 사리는 모습이다.
LG디스플레이 6일 파주공장에서 협력업체와의 상생·소통 등을 주제로 임직원 교육을 했고, 한국전력공사는 7일 발표한 ‘권위주의 타파 14계명’에 반말과 하대를 하지 말자는 내용 등을 담았다.
지난달 말 여직원의 투신자살 사건이 발생한 롯데백화점은 매장 관리자 교육 과정에 ‘갑을 관계’를 되돌아보도록 하는 강의를 이달 도입했고 포스코는 오는 22일 회장 주재의 임원 워크숍에서 반성의 뜻을 담아 윤리실천 다짐대회를 열 예정이다.
◇ 막무가내식 ‘을의 분노’ 경계해야 = 최근 잇단 사건으로 왜곡된 갑을 관계에 대한 사회적 환기는 이뤄졌지만, 그와 함께 두드러진 당사자에 대한 신상 털기 등 개인에 대한 지나친 공격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음성파일이 유포돼 여론의 뭇매를 맞은 남양유업 전 영업사원 이모씨는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며 “백번 잘못했다”면서도 “집안이 망했다. 파일이 공개되고 잠도 못잘 정도로 괴롭다”며 고통을 호소하는 상황도 주목해볼 만하다.
이씨는 자신의 폭언 파일이 다음 아고라 등의 인터넷에 마구잡이로 유포되고 있고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이를 이용하고 있다면서 서울 지방경찰청에 진정서를 내 유포 경위를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앞서 비행기 여승무원 폭행 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포스코에너지 임원은 사표를 제출했고, 호텔 직원 폭행사건의 장본인인 프라임 베이커리 회장은 누리꾼의 분노가 확산하자 결국 제빵업체의 문을 닫았다.
이와 관련해 ‘자업자득’이라는 반응도 많지만, 지나친 여론몰이도 자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누구나 상황에 따라서 갑이 되기도 하고 을이 될 수 있지만, 을의 심리를 더 많이 갖고 있다”며 “을의 입장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분노가 확산하는데, 지나친 군중심리는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갑의 횡포’에 대한 지적이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왜곡된 갑을 관계는 상위 1%의 ‘수퍼갑’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일상적인 현상이라는 점에서 특정인에 대한 공격보다는 사회 전반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 “즉흥적 대응보다 구조·법 개선하는 성과 거둬야” = 남양유업 사태 이후 편의점주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제품 불매운동을 보는 시각도 엇갈린다.
옹호하는 쪽은 자본 권력의 반(反)사회적 행위가 도를 넘은 만큼 불매운동과 같은 강력한 경고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불매운동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즉자(卽自)적인 반응으로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갑’으로 불리는 업체 직원을 모두 ‘악질’로 볼 근거는 없고, 이들도 결국 사용자-노동자라는 틀 안에서 하나의 ‘을’일 뿐이지만 불매운동으로 업체가 타격받으면 무고한 ‘을’에게까지 피해가 돌아갈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포털사이트 다음 토론방 ‘아고라’에 글을 올린 누리꾼 ‘다람쥐주인’은 “불평등한 갑을 관계의 근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결국 자본주의 모순이라는 장벽에 봉착한다”며 “불매운동과 같은 소비자운동은 그 무력감과 좌절감을 잊게 하는 일종의 타협점으로 갑을관계를 개선할 훌륭한 해결책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회사원 신모(31·여)씨는 “갑의 횡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해당 기업 직원 상당수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조직에서 하루하루 실적 압박을 받는 일개 노동자일 것”이라며 “불매운동으로 회사가 망하기라도 하면 그들의 삶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불매운동에 나선 점주들이나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시민사회도 이런 지적을 모르지는 않는다. 남양유업 등 관련된 업체들이 진정성을 담아 사과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갑질’에 대한 강한 거부감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안진걸 경제민주화 국민본부 사무처장은 “남양유업 제품 불매운동은 대리점주들과 마찬가지로 회사로부터 각종 불공정행위를 당한 편의점주들이 연대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라며 “남양유업 대표가 진정성 어린 사과를 하고 피해 배상, 재발방지 약속, 제도적 장치 마련 등 대책을 내놓는다면 이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거대한 기업 권력에 맞서 ‘을’의 권익을 보장받으려면 포괄적인 의미에서 ‘을’에 해당하는 노동자, 협력업체 직원, 편의점주 등이 같은 목소리를 내고, 궁극적으로 정치권을 압박해 제도 개혁으로까지 이어지게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가맹점주에 대한 가맹본부의 횡포를 막는 내용의 가맹사업법 개정안이 4월 임시국회에서 여야 간 견해차로 결국 처리가 무산되자 가맹점주들과 시민단체들에선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안진걸 사무처장은 “사측의 태도가 전향적으로 바뀌고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통과될 때까지는 불매운동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해당 업체가 망하라는 뜻이 아니라 반사회적 행위를 계속하는 기업과 이를 제지할 제도 마련에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국회를 향한 경고로 받아들여 달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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