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마음이 뒤숭숭하고 괜히 바쁘다는 핑계로 미자씨의 송년회는 11월부터 시작된다. 특히 그녀의 중학교 동창 모임은 모든 송년회의 첫 테이프를 끊는 기록을 십년 넘게 지속하고 있다. 이 송년회의 특징은 평소 입던 옷 그대로, 민낯에 빨간 립스틱 하나 바르고 모이면 그만이라는 점이다. 동창이라고 해 봐야 열 명 안쪽인데 30년 넘게 인생을 함께 걸어온 친구들끼리 여기서만큼은 제발 꾸미고 어쩌고 하지 말자는 울부짖음에 다들 쌍수 들고 찬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껏해야 일 년에 두세 번 보는 옛 친구들이라 일단 모이면 서너 시간은 기본으로 따발총 쏘듯 수다가 이어진다. 마흔 중반을 넘긴 나이라 주제는 병(病) 자랑으로 시작해 나이 듦에 대한 회환으로 폭풍 전개된다. 오늘의 토픽 중 유난히 인기를 끄는 키워드는 건망증.
학창 시절 내리 전교 1등의 신화였던 영은씨.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국내 최고의 로펌에서 종횡무진 활약 중이다. 그런 그녀도 피해 갈 수 없는 증세가 있었으니 바로 깜빡증. 까칠한 그녀지만 요즘은 부하 직원을 불러놓고 왜 불렀더라 생각하며 눈만 껌벅거리는 일이 있다고 울상이다. 어머 그건 깜빡증도 아니라며 중간에 말을 탁 토막 치고 들어오는 경숙씨. 컴퓨터를 서둘러 켜고 왜 켰는지 기억나지 않는 일로 시작해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는 도중 호주머니를 뒤져 가며 내 핸드폰이 어디 갔더라 하는 바람에 비웃음을 당한 일까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정도다.
건망증의 원인은 스트레스, 과한 음주, 노화 등 다양하지만 그들은 가장 흉악한 원인으로 스트레스를 꼽았다.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워킹맘이기에 살벌한 회사생활에 육아까지 이중고를 겪는다. 사춘기 자식의 묻지마 반항에 억장이 무너지고 여성호르몬이 많아지는지 툭하면 삐지는 남편 눈치도 봐야 한다. 막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직장에서조차 몇 배로 고군분투하는 역전의 용사들이여. 수시로 깜빡하며 당연한 이름도 가물가물하고 물건도 빠뜨리다가 나중에 어찌어찌 수습해 가며 잦아지는 건망증에 한숨 쉰다.
이때까지 별말 없이 웃고만 앉아 있던 미영씨. 자꾸 깜빡하면 어때? 다 기억하는 게 좋은가 말이야. 계속 살아야 하는데 자꾸 잊어버리는 것도 있어야 덜 복잡하지…. 자식이나 남편 때문에 속 끓인 일, 상사 때문에 가슴에 못 박힌 일, 억울한 승진누락, 돌려받지 못한 돈, 시도때도 없이 속 긁어 대는 시누이까지 차곡차곡 속에 담아 두고 기억하면 좋을 일이 대체 뭐냐고 말이다.
냉장고를 열고 뭘 꺼내려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 냉장고 속에 얼굴 박고 서 있거나 어느 날 아파트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당황스러워도 치매 증상은 아니니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그럴 수 있다. 젊은이들도 카페에서 진동 벨을 핸드백 속에 넣기도 하고, 닭갈비집 앞치마도 목에 걸고 오는 판에 그게 무슨 대순가. 그저 소소한 건망증에 나쁜 일, 속상한 일까지 세트로 묶어 같이 잊으면 남는 장사라는 게 그녀들이 내놓은 결론이다.
올해가 꼭 한 달 남았다. 올해는 왜 그리 바쁘고 분주했을까. 먹고사는 일이 만만치 않아 빠듯했던 일상. 그 와중에 내게 서운하게 했던 사람, 아예 거품 물고 넘어갈 만큼 소원해진 사람이라도 먼저 전화하자. 건망증이라 다 잊은 마냥 잘 지내냐고, 올해가 가기 전 차라도 한잔하자면서 말이다. 진짜 잊었으면 말해 뭐하겠는가. 정신건강에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지 말이다. 나쁜 일, 험한 일은 건망증 때문에 깨끗이 잊어버리는 그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는 한 해의 마무리를 소망하며.
유세미 작가
학창 시절 내리 전교 1등의 신화였던 영은씨.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국내 최고의 로펌에서 종횡무진 활약 중이다. 그런 그녀도 피해 갈 수 없는 증세가 있었으니 바로 깜빡증. 까칠한 그녀지만 요즘은 부하 직원을 불러놓고 왜 불렀더라 생각하며 눈만 껌벅거리는 일이 있다고 울상이다. 어머 그건 깜빡증도 아니라며 중간에 말을 탁 토막 치고 들어오는 경숙씨. 컴퓨터를 서둘러 켜고 왜 켰는지 기억나지 않는 일로 시작해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는 도중 호주머니를 뒤져 가며 내 핸드폰이 어디 갔더라 하는 바람에 비웃음을 당한 일까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정도다.
건망증의 원인은 스트레스, 과한 음주, 노화 등 다양하지만 그들은 가장 흉악한 원인으로 스트레스를 꼽았다.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워킹맘이기에 살벌한 회사생활에 육아까지 이중고를 겪는다. 사춘기 자식의 묻지마 반항에 억장이 무너지고 여성호르몬이 많아지는지 툭하면 삐지는 남편 눈치도 봐야 한다. 막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직장에서조차 몇 배로 고군분투하는 역전의 용사들이여. 수시로 깜빡하며 당연한 이름도 가물가물하고 물건도 빠뜨리다가 나중에 어찌어찌 수습해 가며 잦아지는 건망증에 한숨 쉰다.
이때까지 별말 없이 웃고만 앉아 있던 미영씨. 자꾸 깜빡하면 어때? 다 기억하는 게 좋은가 말이야. 계속 살아야 하는데 자꾸 잊어버리는 것도 있어야 덜 복잡하지…. 자식이나 남편 때문에 속 끓인 일, 상사 때문에 가슴에 못 박힌 일, 억울한 승진누락, 돌려받지 못한 돈, 시도때도 없이 속 긁어 대는 시누이까지 차곡차곡 속에 담아 두고 기억하면 좋을 일이 대체 뭐냐고 말이다.
냉장고를 열고 뭘 꺼내려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 냉장고 속에 얼굴 박고 서 있거나 어느 날 아파트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당황스러워도 치매 증상은 아니니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그럴 수 있다. 젊은이들도 카페에서 진동 벨을 핸드백 속에 넣기도 하고, 닭갈비집 앞치마도 목에 걸고 오는 판에 그게 무슨 대순가. 그저 소소한 건망증에 나쁜 일, 속상한 일까지 세트로 묶어 같이 잊으면 남는 장사라는 게 그녀들이 내놓은 결론이다.
올해가 꼭 한 달 남았다. 올해는 왜 그리 바쁘고 분주했을까. 먹고사는 일이 만만치 않아 빠듯했던 일상. 그 와중에 내게 서운하게 했던 사람, 아예 거품 물고 넘어갈 만큼 소원해진 사람이라도 먼저 전화하자. 건망증이라 다 잊은 마냥 잘 지내냐고, 올해가 가기 전 차라도 한잔하자면서 말이다. 진짜 잊었으면 말해 뭐하겠는가. 정신건강에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지 말이다. 나쁜 일, 험한 일은 건망증 때문에 깨끗이 잊어버리는 그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는 한 해의 마무리를 소망하며.
2017-11-2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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