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만 써도 생활 가능한 ‘아날로그 日’… 전범기업 폭파범 49년 도피 가능했다

현금만 써도 생활 가능한 ‘아날로그 日’… 전범기업 폭파범 49년 도피 가능했다

김진아 기자
김진아 기자
입력 2024-01-30 02:40
수정 2024-01-30 02:40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본명으로 죽겠다” 자수 뒤 숨져

미쓰비시 등 폭파 주도, 8명 사망
토목회사 수십 년 가명 근무 ‘무사’
지문도 확보 못한 日경찰은 허탈
이미지 확대
기리시마 사토시. 연합뉴스
기리시마 사토시.
연합뉴스
1970년대 일본 전범 기업을 대상으로 연쇄 폭파 사건을 일으키고도 50년 가까이 경찰의 수배망을 피해 살았던 기리시마 사토시(70)가 29일 오전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의 한 병원에서 숨졌다. 일본 최장기 수배자이자 이 사건과 연루된 유일한 수배자였던 그는 경찰에 자수한 지 며칠 만에 병세가 악화돼 세상을 떠났다.

히로시마현 출신인 기리시마는 일본 사립대인 메이지가쿠인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이던 1972년 급진무장단체인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을 결성했다. 이들은 1974~75년 미쓰비시중공업과 미쓰이물산 등 전범 기업을 대상으로 폭파 사건을 일으켰다. 미쓰비시중공업에서는 당시 폭발로 8명이 사망하고 380명이 부상했다.

기리시마가 노린 또 다른 곳은 도쿄 긴자에 있던 한국산업경제연구소였다. 그는 이곳을 전범 기업에 한국 관련 정보를 넘겨주는 거점으로 보고 1975년 4월 사무실 출입문에 폭탄을 설치했다. 폭탄은 한밤중에 폭발하면서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경찰은 이 사건을 주도한 7명을 모두 검거했지만 기리시마만 잡지 못했다. 테러 직후인 그해 5월 시부야구의 한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한 게 경찰이 확인한 그의 마지막 행적이었다.

지금까지도 열차역과 파출소 등 곳곳에 그의 수배 전단이 붙어 있지만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 기리시마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건 1년 전부터 앓아 온 위암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지난 25일 의료진에게 “내가 기리시마 사토시다. 마지막을 내 본명으로 맞고 싶다”며 경찰에 신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일본 경시청은 기리시마의 갑작스러운 자수 소식에 긴급 출동했다. 위중한 상태였던 기리시마는 의식을 잃어 가면서도 경찰에 본인만 알 수 있는 사건, 가족 구성 등을 이야기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우치다 히로시’라는 가명으로 가나가와현 토목회사에서 수십 년 동안 일하면서도 잡히지 않았던 행적도 드러났다. 그는 의료보험증과 은행 계좌를 만들지 않았고, 월급은 모두 현금으로 수령했다. 일본은 현금으로도 생활이 가능했던 아날로그 사회였기에 그가 50년 가까이 다른 신분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언론은 그의 사망을 속보로 띄우며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이날 NHK에서 가장 많이 읽은 뉴스는 기리시마 사망 보도였다. 오랫동안 그를 추적해 온 일본 경찰은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사건 당시 그의 지문도 확보하지 못했던 상태라 경찰은 그의 친척을 통해 DNA 감정으로 신원을 확인하려던 참이었다. 기리시마 수사를 했던 한 전직 경찰은 NHK에 “법의 심판을 받을 일이 사라져 수사해 온 사람으로서 정말 괴로운 심정”이라고 말했다.
2024-01-30 14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