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속 별장… 안견의 ‘몽유도원도’ 나올 만하네

서울 속 별장… 안견의 ‘몽유도원도’ 나올 만하네

입력 2019-07-24 18:02
업데이트 2019-07-25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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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13>부암동 능금나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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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 삼거리의 한정식집 석파랑 벼랑 위에 있는 한옥이 대원군이 머물던 석파정 별당이다. 1958년 소전 손재형이 석파정에서 통째 옮겨 왔다. 오른쪽 아래에는 순종황후 윤씨의 생가를 이전해 놓은 게 있다.
세검정 삼거리의 한정식집 석파랑 벼랑 위에 있는 한옥이 대원군이 머물던 석파정 별당이다. 1958년 소전 손재형이 석파정에서 통째 옮겨 왔다. 오른쪽 아래에는 순종황후 윤씨의 생가를 이전해 놓은 게 있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3회 부암동 능금나무길’ 편이 지난 20일 종로구 부암동 일대에서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참가자 4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태풍의 북상을 알리는 일기예보에도 아랑곳없이 집결지 윤동주 문학의 집에 모였다. 시인의 언덕~무계원(오진암 이전지)~현진건 집터(무계정사 옛터)~환기미술관~능금마을~백사실(추사 김정희 별서)~백석동천 바위~부침바위(부암) 터~석파랑을 거치며 부암동을 주름잡았다.이날 코스에 서울미래유산은 석파랑 한 곳뿐이어서 코스 기획에 애로가 있었지만 진행하길 잘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왜냐하면 부암동은 ‘일당백’이니까. 풍파를 이겨 내고 살아남은 한옥 한 채만으로도 값어치는 충분했다. 투어를 이끈 정순희 해설자는 한여름 부암동 산골과 도시골목의 추억을 참가자들의 가슴에 새겨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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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 능금마을은 서울 속 산골이다. 광화문에서 직선거리로 2~3㎞에 불과한 이 마을 어귀에 들어선 순간 지리산 골짜기로 시간이동한 듯했다. 굳이 멀리 떠날 필요가 있을까. 서울에서 옛사람의 별서(별장)터와 요즘 사람의 별서를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 그만이다. 부암동 능금마을엔 능금밭이 없다. 능금나무 몇 그루뿐이다. 그래도 이 마을을 능금마을, 이 길을 능금나무길이라고 부르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인평대군, 中서 능금나무씨 가져와 심었다는 설

능금마을의 유래는 여러 갈래다. 토종 사과가 열리던 이곳에 조선 인조의 셋째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이 중국 땅을 11차례 드나들면서 능금 씨를 가져다가 심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주민들은 1970년대 중반까지 능금을 팔아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매년 봄이면 능금마을 아래 백사실 계곡에는 알을 깨고 나온 도롱뇽이 꼬리를 흔들고 다닌다. 산개구리, 버들치, 가재가 꼬물거린다.

부암동은 북한산 문수봉·보현봉·비봉과 백악산, 인왕산이 첩첩을 이룬 산중마을이다. 흘러내린 물은 세검정계곡을 따라 홍제천을 이룬다. 6세기 신라 진흥왕이 이 계곡을 거슬러 올라 비봉에 순수비를 세웠고 7세기 장의사, 8세기 승가사가 들어섰다. 신라의 전설이 깃든 계곡이다. 부암동에는 ‘무계동’, ‘백석동천’, ‘삼계동’이란 바위 각자가 남아 있다. 15세기 안평대군이 집(무계정사) 뒤 바위에 새긴 글이 무계동이다. 청계동천의 입구이며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여기서 탄생했다. 백석동천 바위각자는 ‘흰 돌이 많은’ 백사실 계곡에 붙인 이름이고 삼계동은 석파정 암벽에 새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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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암동에 위치한 백사실(백석동천) 별서 터. 폐허의 미학으로 남은 주춧돌은 별서 건물의 흔적이다. 남쪽에 6각 정자 연못이 한국전쟁 전까지 남아 있었다.
서울 부암동에 위치한 백사실(백석동천) 별서 터. 폐허의 미학으로 남은 주춧돌은 별서 건물의 흔적이다. 남쪽에 6각 정자 연못이 한국전쟁 전까지 남아 있었다.
●안평대군 추종자들 따라와 무계동·삼계동 생겨

인적이 없던 계곡에 안평대군의 추종자들이 들어와 살면서 무계동, 부암동, 삼계동, 백석동이라는 자연부락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5세기 문신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도성 밖 놀 만한 곳으로는 장의사(세검정초등학교) 앞 시내가 가장 아름답다.…무이정사(무계정사)의 옛터가 있는데 길 앞에는 돌을 수십 길이나 쌓아 올린 수각이 있다”고 적었다. 17세기 문인화가 겸재 정선은 ‘청송당’, ‘취미대’, ‘백악산’, ‘청하동’(자하동), ‘청풍계’, ‘수성동’, ‘인왕산’, ‘세심대’ 같은 장동팔경 진경산수화를 남겨 그때 그 풍경을 짐작하게 한다.

창의문은 이름이 무려 다섯이다. 4대문, 4소문은 모두 별칭을 갖고 있지만 유독 창의문은 북소문, 장의문, 자하문, 자문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이름이 많다는 건 그만큼 이미지가 다양하다는 뜻이다. 창의문은 백악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움푹한 고갯마루에 세웠고, 본래 문루가 없었다.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군을 한양에 진입하게 한 공이 있다고 하여 영조 17년(1741) 비로소 문루를 세우고 반정공신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었다.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됐다.

1970년대 평창동과 구기동에 택지가 개발됐다. 1971년 북악터널, 1980년 구기터널, 1986년 자하문터널이 각각 뚫리면서 거주 여건은 좋아졌지만 풍광은 무너졌다. 부암동은 1936년 고양군에서 서울 서대문구가 됐고 1975년에 종로구에 편입됐다. 2007년 백악산 개방 이후 창의문도 개방됐다. 창의문 밖은 세검정을 중심으로 부암동, 평창동, 신영동, 홍지동, 구기동이 펼쳐진다.

개발광풍 앞에 옛 흔적은 지워지고 푯돌 몇 개만 남았다. 부암동이라는 지명을 낳은 집채 크기의 ‘곰보’ 부침바위는 도로확장과 함께 사라졌다. 사진 한 장이 유일한 흔적이다. 부암동경로당 앞에 부침바위 푯돌이 있다. 그나마 남은 별서와 별서 터가 위안을 준다. 총융청(신영)이라고 하는 북쪽을 지키는 군 주둔지가 개발제한구역, 군사보호구역, 청와대경호구역으로 이어진 덕분이다. 창의문을 중심으로 부암동 서쪽 인왕산 자락은 청계동천이요, 동쪽 백악산 자락은 백석동천이다. 백석동천에 백사실 별서 터가 있다면 청계동천에는 무계정사 터가 있다. 무계정사 위쪽으로는 반계 윤웅렬의 부암정이, 무계정사 아래쪽에는 흥선대원군의 석파정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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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들이 능금나무길을 따라 능금마을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길 아래 계곡에서는 도롱뇽과 버들치, 산개구리가 꼬물거렸다. 그러나 조선 인조 때 인평대군이 중국에서 씨를 가져와 심었다는 능금나무는 몇 그루 보이지 않았다.
참가자들이 능금나무길을 따라 능금마을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길 아래 계곡에서는 도롱뇽과 버들치, 산개구리가 꼬물거렸다. 그러나 조선 인조 때 인평대군이 중국에서 씨를 가져와 심었다는 능금나무는 몇 그루 보이지 않았다.
● 석파정 별당·석파정 서울시 유형문화재 지정

부암동을 찾는 사람들은 보통 세 가지를 혼동한다. 첫째는 석파정과 석파랑의 구별법이다. 둘째는 무계정사와 무계원을 헛갈린다. 셋째는 백사실 별서 터의 주인이다. 석파정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장동 김씨 세도가 김홍근으로부터 강탈한 집이다. 흥선대원군은 앞산이 모두 바위 언덕인 이 집의 이름을 석파정이라고 짓고, 자신의 호도 석파라고 정했다. ‘대원군 별장’으로 통한다. 2012년 서울미술관이 들어선 이 집은 조선시대 도성 밖 최고의 별서이다. 동명의 한정식집으로 쓰이는 석파랑은 세검정 삼거리에 있는 소전 손재형의 별서이다. 별서 위쪽 언덕배기에 자리한 ㄱ자 구조, 맞배지붕 한옥이 대원군이 머물던 ‘석파정 별당’이다. 석파정이 고아원과 요양원으로 쓰이면서 훼손 위기에 처하자 1958년 소전이 통째 자신의 집에 옮겨 놓았다. 석파정 별당과 석파정은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3호와 26호로 지정됐다.

무계원은 익선동에 있던 조선의 마지막 내시이자 수집가 이병직의 집이었다가 1953년 서울음식점 제1호로 등록된 한정식집 오진암을 2014년 옮겨 놓은 문화공간이다. 안평대군의 옛집인 무계정사 가는 길 초입에 있다고 하여 무계원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백석동천의 주인은 누구인가. 별서 터를 중심으로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부속 건물의 초석이 열주처럼 늘어선 아늑하고 고즈넉한 숲속이다. 별서 아래 남쪽엔 타원형의 연못과 ‘백석정’이라고 알려진 6각 정자의 주춧돌이 놓여 있다. 백석동천과 월암이라고 새긴 각자바위가 주변을 감싸고 있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2에서 ‘폐허의 미학’이라고 지칭한 그곳이다. 백석동천의 다른 이름이 백사실이어서 한때 백사 이항복의 별서라고 알려졌으나 사실무근이다. 영조 때 문인화가 허필의 별서로 지칭되기도 했다.

2012년 한국전통문화대 최영성 교수가 발표한 논문 ‘백사실 별서에 대한 고찰’에서 추사 김정희가 구입해 소유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추사의 ‘완당전집’에서 “나의 북쪽 별서를 말한다. 백석정의 옛터가 있다”는 설명을 찾은 것이다. 이 별서는 1930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 화보에 ‘북악8경’ 중 ‘백석곡 8각정’이라고 소개됐다. 사진에는 “창의문을 나서 백석곡을 찾아 아늑한 산골짝에 드니 조그만 8각정이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6각정을 8각정이라고 오인한 정자는 한국전쟁 때 불탔다. 별서는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1967년에 간행한 ‘동명(洞名)연혁고’에 건재한 것으로 기록됐으나 1970년 허물어졌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14회 서울의 대중가요2(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일시 및 집결장소: 7월 27일(토) 오후 6시 마포역 4번 출구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 (www.suci.kr)

2019-07-2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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