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주도 성장론, ‘소규모 개방경제’ 한국에 적합한가

소득주도 성장론, ‘소규모 개방경제’ 한국에 적합한가

입력 2015-03-01 10:25
수정 2015-03-01 10:25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경제 규모가 3% 넘게 성장하고, 일자리는 12년 만에 가장 많이 늘었는데도 근로자들의 임금이 조금 오르는 데 그친 가운데 소득주도 성장론(임금주도성장론)이 관심을 받고 있다.

경제성장률을 밑도는 임금 상승률이 내수 경기 회복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에 근로자들의 임금을 올려 ‘가계소득 증가→소비 증가→내수 활성화’의 선순환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국제적으로도 근로자의 임금 상승을 통해 수요를 창출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최저임금 인상을 추진 중이고,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대기업에 임금 인상을 독촉했다.

그러나 소득주도 성장론이 수출 주도의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 현실에 맞지 않다는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 “가계소득 올려야 소비·투자 선순환”

소득주도 성장론은 국제노동기구(ILO)가 2010년부터 제기하기 시작한 성장 담론이다. 전 세계적인 저성장의 원인을 임금 격차에 따른 소득 불평등에서 찾는 것이 특징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 정부가 적극적인 ‘돈 풀기(양적완화)’ 정책을 폈음에도 경기는 기대만큼 되살아나지 않았다. 대기업이 성장하면 그 혜택이 아래로 퍼진다는 ‘낙수효과’에 대한 의구심도 커졌다.

이에 국민 소득을 직접적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이 새로운 카드로 떠올랐다.

소득주도 성장론자들은 임금을 ‘비용’으로 보던 기존 관점에서 벗어나 ‘소비의 원천’으로 여기고 있다. 가계 소득이 늘어야 소비가 증가하고 기업 투자가 활발히 일어나 고용 창출, 경제 성장의 선순환을 이룰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렇다고 이들이 무조건적 임금 인상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선 노동생산성이 늘어난 만큼 실질임금이 증가하지 못해 경제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가계에 제 몫을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2008∼2013년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은 연평균 3.2%, 노동생산성은 3.0% 증가했다. 그러나 이 기간 근로자 실질임금은 연평균 1.3% 늘어나는 데 그쳤다.

박종규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근로자가 기여한 생산성만큼 임금을 올려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가계가 덜 받아가고 기업에 더 배분되는 구조였다”며 “가계 소득이 늘어나지 않으니 소비가 안 되고, 가계부채는 늘고, 기업의 고용·투자도 부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20년 장기 불황과 내수 부진의 요인을 실질임금 하락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일본은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 하락)에도 불구하고 1997년부터 실질임금이 떨어져 불황이 깊어졌다는 분석이다.

최근에는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소득주도 성장론을 주장하고 있다. 국민의 지갑을 두툼하게 해주는 경제를 통해 임금 노동자와 자영업자의 소득을 늘리고, 복지정책으로 중산 서민층의 생활비를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구체적인 방안으로 노동자 평균 임금의 50% 수준(150만원)까지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방안,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확립, 비정규직 축소, 정규직 고용 확대 등을 제시했다.

◇ “수출 주도형 개방경제…내수부양 得 크지 않아”

소득주도 성장론이 미국·일본에서도 제기돼 탄력을 받고 있지만, 이를 한국에 적용할 수 있을지 정치권과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소득주도 성장론의 선순환 고리에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 현실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수출·수입이 활발한 개방경제에서 인건비는 제품의 가격경쟁력과 직결된다. 인건비 상승으로 제품가격이 올라간다면 국내제품 소비 대신 저렴한 외국 제품 수입이 증가해 내수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리면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비판도 있다. 아파트 경비원을 채용하는 대신 CCTV를 설치하는 식으로 오히려 일자리가 더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은 “소득주도 성장론은 이론적으로는 그럴싸하지만 의도한 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며 “한국은 내수시장이 작은 소규모 개방경제여서 우리 물건이 외국에 팔려야 일자리가 생기고 소득이 늘어나는 구조”라고 말했다.

국내 기업의 주력 사업이 수출 주도형으로 굳어진 상황에서 내수 소비가 늘어 얻을 수 있는 기업과 경제 전반의 혜택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김동원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는 “지금까지 한국 경제는 어려워질 때마다 수출에서 돌파구를 찾았지만, 지금은 중국의 추격과 세계 교역성장률 둔화 등으로 ‘전가의 보도’를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개발 시대의 거품을 줄이고 ‘뉴노멀’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배 부원장은 “지금의 주력산업으로는 수출을 더 이상 끌고나가기 어렵다”며 “다양한 규제나 진입 장벽을 풀어 새로운 먹을거리, 신산업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정부, 경제활성화에 무게

정부는 소득주도 성장의 필요성에 대해 가계나 근로자의 소득 증가도 중요하지만 경제 전반적인 부분이 균형을 맞추면서 성장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현 정부도 소득 증대의 중요성을 인식해 최저임금 인상, 가계소득 증대 세제 3종 세트 등 근로자나 가계의 소득증대에 신경을 쓰고 있다”면서도 “늘어난 소득이 소비로 이어지고 확대된 소비가 다시 투자와 고용으로 연결되는 고리를 만들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부는 지난 7월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취임 이후부터 기업의 소득을 가계로 환류시키는 가계소득 증대 세제 3종 세트, 최저임금 인상률 7%대로 확대, 공기업 임금인상률 3.8%로 확대 등 소득 증대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큰 효과는 없는 상태이고 최근 들어서는 정부 정책이 소득 증대보다는 구조개혁과 기업투자 촉진 등을 통한 경제활성화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으며 담뱃값 인상, 연말정산 파문 등으로 기존의 소득 증대 정책도 빛을 잃고 있다.

정부의 다른 관계자는 “가계부채가 많고 불안한 미래에 대한 준비를 위해 의도적으로 소비를 자제하는 상황에서 소득주도 성장 정책은 소비 증대로 연결되기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늘어난 소득을 빚을 갚거나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하지 소비에 활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기획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가계와 기업 등 경제 각 부분이 고른 성장세를 보이는 게 중요하고 경제활성화를 통해 경기의 선순환 구조를 튼튼하게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