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 성향의 한국현대사학회 출신 학자들이 집필했다고 해서 논란의 대상이 된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실제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연합뉴스는 2일 경기 과천 중앙동 국사편찬위원회(국편)를 찾아 진보·보수 진영의 대리전(戰)의 중심에 선 해당 교과서의 최종 심사본을 살펴봤다.
우선 이 교과서에는 누리꾼들 사이에서 퍼진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표현하고 있으며 5·16 군사정변을 혁명으로 미화하고 4·19 혁명을 학생운동으로 폄훼하고 있다”는 내용은 없었다.
교과서 323쪽은 4·19를 혁명으로, 324쪽은 5·16을 군사정변으로, 326쪽은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정의했다.
이 교과서는 5·16 쿠데타에 대해 “5·16 군사 정변은 헌정을 중단시킨 쿠데타였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이리하여 5·18 민주화운동은 당장은 민주화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였지만, 세계적으로 군부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의 선례가 되었다”고 기술했다.
이외에도 이 책은 전체적으로 진보와 보수의 역사관 사이에서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으나 유독 이승만·박정희 정권 시절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주류를 이뤘다.
이 교과서 챕터 Ⅵ ‘대한민국의 발전과 현대 세계의 변화’에서 3장은 ‘자유 민주주의의 발전’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교과서는 자유 민주주의의 출발점을 이승만 정권으로 잡고는 박정희 정권을 거쳐 1987년 체제로 연결하고 있다.
다른 역사 교과서에서 자유 민주주의 발전의 변곡점을 5·18 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으로 규정하는 것과는 큰 차이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277쪽 ‘탐구활동’ 영역에서 “국제 정세의 판단에서 놀라울 정도의 탁월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미 수년 전부터 워싱턴에 복귀해 반일 국제 여론을 형성하였다. 집필 활동에 들어갔고, 1941년 초에 출간된 그의 역저 ‘일본내막기’는 미국 지식층과 정계의 주목을 받았다”(277쪽)는 내용을 인용했다.
”’사사오입’의 논리를 내세워 부결 선언을 반복하고 개정 헌법을 공포하였다. 이는 자유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을 훼손한 것으로 이승만 정부의 정당성은 크게 손상되었다”(323쪽)는 평가도 내렸지만 과(過)보다는 공(功)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려는 태도가 엿보였다.
가장 논란이 예상되는 부분은 박 전 대통령과 관련한 대목이다.
”제2공화국은 4·19 혁명에 참여하였던 다양한 세력으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었다. 김일성이 1960년 8월에 남북 연방제를 제안하는 등 은밀한 적화를 기도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남북 학생 회담을 주장하였고, 혁신계의 정당들은 북한과의 정치 협상을 주장하였다. 장면 정부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특히, 북한과의 대치 상황에서 군비축소를 약속하고, 사회적으로 치안이 어려운 상황에서 4,500여 명의 경찰을 해고하고, 경찰력의 대부분을 타지로 전출시키는 등 경찰의 치안 능력을 약화시켜 혼란을 자초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를 중심으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를 단행하였다.”(324쪽)
박 전 대통령이 일으킨 5·16 쿠데타가 비록 헌정을 중단시킨 군사 정변이긴 했으나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 이바지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로 읽힌다.
교학사 교과서는 5·16 쿠데타에 대해 “반공과 함께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강조하였다. 대통령 윤보선은 쿠데타를 인정하였다. 육사 생도도 지지 시위를 하였다. 미국은 곧바로 정권을 인정하였다”(324쪽)라고 부연했다.
이에 반해 비상교육이 발행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장면 정부가 경제 개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군대를 축소하려 하자 일부 군인 세력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군인 세력은 장면 정부의 무능과 사회 혼란을 구실로 삼아 1961년 5월 16일 군대를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364쪽)라고 써 대조를 이뤘다.
이외에도 교학사 교과서에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해 한국 경제 성장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며 당시 집권을 합리화하는 내용이 크게 다뤄졌다. 반면 박 전 대통령이 군정에 비판적인 정치인과 언론의 활동을 금지하고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비판 세력을 탄압했다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1965년 한일협정에 관련한 내용도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신속한 경제 건설을 위해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서두르기로 하고 한·일 회담을 진행하였다. 야당은 반대하였고 학생들은 시위를 벌였다. 1964년 6월에는 서울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할 정도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나 정부는 1965년 국교 정상화를 이루었다.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확보된 대일 청구권 자금과 차관은 경제 건설에 큰 힘이 되었다”(324쪽)
한일협정이 야권과 학생들로부터 반발을 샀다는 내용은 담았지만 이들이 왜 그랬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반면 비상교육 역사 교과서는 “그러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 일본인 위안부·징용 피해자·원폭 피해자 등에 대한 배상, 약탈 문화재 반환, 독도 문제 등은 해결되지 못하였다”고 반발 이유를 상세하게 담았다.
박 전 대통령이 종신집권을 꾀한 1972년 10월 유신에 대해서도 북한 무장공비들의 청와대 기습작전이었던 1·21사태를 비롯해 미군 철수 등 당시의 상황을 전하며 “이같은 긴박한 분위기에서 박정희는 1971년 12월 국가 비상 사태를 선언하였다. 또한 통제와 동원을 쉽게 하기 위하여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325쪽)라며 유신 체제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데 주력했다.
이밖에 “일제는 1944년 여자 정신 근로령을 발표하고 12세에서 40세까지의 여성들은 침략 전쟁에 동원하였다. 동원된 여성들은 일본과 한국의 군수 공장에서 일하였다. 일부 여성들은 중국, 동남아 일대, 필리핀 등지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로 희생당하였다”(247쪽)는 대목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축소해서 다뤘다는 의심을 사게 한다.
역대 정권 평가에서도 노태우,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부정적 평가가 주로 눈에 띈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교학사 역사 교과서가 내세우는 장점이라 할 만한 점도 눈에 띤다. 우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역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점은 다른 교과서와 차별화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챕터 Ⅵ 5장 ‘북한의 실상과 남북 간의 통일 노력’에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북한의 군사 도발, 남북한 민간인 교류, 북한의 인권 상황, 북한의 군사력 유지와 그 의미 등 10페이지에 걸쳐 북한의 현대사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일제강점기가 조선의 근대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은 없었고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과 관련해 무장독립 투쟁에만 방점을 찍은 기존 교과서들과는 달리 1910∼1920년대 국내외의 실력양성운동과 1920∼1930년대 국외에서 전개된 외교독립운동의 성과 등을 병행해 기술한 점은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한편,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비롯해 지난달 30일 국편에서 최종 합격을 받은 교과서 8종은 이달 달 중 각 학교에 전시돼 학교별 채택과정을 거친 뒤 내년 3월부터 일선 고교에서 사용된다.
진보진영에서는 이 교과서가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확인한 뒤 대응 방안을 마련한다는 입장이어서 국편의 이날 공개는 진보·보수 진영 간의 ‘역사 교과서 전쟁’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연합뉴스
연합뉴스는 2일 경기 과천 중앙동 국사편찬위원회(국편)를 찾아 진보·보수 진영의 대리전(戰)의 중심에 선 해당 교과서의 최종 심사본을 살펴봤다.
우선 이 교과서에는 누리꾼들 사이에서 퍼진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표현하고 있으며 5·16 군사정변을 혁명으로 미화하고 4·19 혁명을 학생운동으로 폄훼하고 있다”는 내용은 없었다.
교과서 323쪽은 4·19를 혁명으로, 324쪽은 5·16을 군사정변으로, 326쪽은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정의했다.
이 교과서는 5·16 쿠데타에 대해 “5·16 군사 정변은 헌정을 중단시킨 쿠데타였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이리하여 5·18 민주화운동은 당장은 민주화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였지만, 세계적으로 군부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의 선례가 되었다”고 기술했다.
이외에도 이 책은 전체적으로 진보와 보수의 역사관 사이에서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으나 유독 이승만·박정희 정권 시절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주류를 이뤘다.
이 교과서 챕터 Ⅵ ‘대한민국의 발전과 현대 세계의 변화’에서 3장은 ‘자유 민주주의의 발전’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교과서는 자유 민주주의의 출발점을 이승만 정권으로 잡고는 박정희 정권을 거쳐 1987년 체제로 연결하고 있다.
다른 역사 교과서에서 자유 민주주의 발전의 변곡점을 5·18 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으로 규정하는 것과는 큰 차이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277쪽 ‘탐구활동’ 영역에서 “국제 정세의 판단에서 놀라울 정도의 탁월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미 수년 전부터 워싱턴에 복귀해 반일 국제 여론을 형성하였다. 집필 활동에 들어갔고, 1941년 초에 출간된 그의 역저 ‘일본내막기’는 미국 지식층과 정계의 주목을 받았다”(277쪽)는 내용을 인용했다.
”’사사오입’의 논리를 내세워 부결 선언을 반복하고 개정 헌법을 공포하였다. 이는 자유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을 훼손한 것으로 이승만 정부의 정당성은 크게 손상되었다”(323쪽)는 평가도 내렸지만 과(過)보다는 공(功)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려는 태도가 엿보였다.
가장 논란이 예상되는 부분은 박 전 대통령과 관련한 대목이다.
”제2공화국은 4·19 혁명에 참여하였던 다양한 세력으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었다. 김일성이 1960년 8월에 남북 연방제를 제안하는 등 은밀한 적화를 기도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남북 학생 회담을 주장하였고, 혁신계의 정당들은 북한과의 정치 협상을 주장하였다. 장면 정부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특히, 북한과의 대치 상황에서 군비축소를 약속하고, 사회적으로 치안이 어려운 상황에서 4,500여 명의 경찰을 해고하고, 경찰력의 대부분을 타지로 전출시키는 등 경찰의 치안 능력을 약화시켜 혼란을 자초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를 중심으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를 단행하였다.”(324쪽)
박 전 대통령이 일으킨 5·16 쿠데타가 비록 헌정을 중단시킨 군사 정변이긴 했으나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 이바지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로 읽힌다.
교학사 교과서는 5·16 쿠데타에 대해 “반공과 함께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강조하였다. 대통령 윤보선은 쿠데타를 인정하였다. 육사 생도도 지지 시위를 하였다. 미국은 곧바로 정권을 인정하였다”(324쪽)라고 부연했다.
이에 반해 비상교육이 발행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장면 정부가 경제 개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군대를 축소하려 하자 일부 군인 세력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군인 세력은 장면 정부의 무능과 사회 혼란을 구실로 삼아 1961년 5월 16일 군대를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364쪽)라고 써 대조를 이뤘다.
이외에도 교학사 교과서에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해 한국 경제 성장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며 당시 집권을 합리화하는 내용이 크게 다뤄졌다. 반면 박 전 대통령이 군정에 비판적인 정치인과 언론의 활동을 금지하고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비판 세력을 탄압했다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1965년 한일협정에 관련한 내용도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신속한 경제 건설을 위해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서두르기로 하고 한·일 회담을 진행하였다. 야당은 반대하였고 학생들은 시위를 벌였다. 1964년 6월에는 서울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할 정도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나 정부는 1965년 국교 정상화를 이루었다.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확보된 대일 청구권 자금과 차관은 경제 건설에 큰 힘이 되었다”(324쪽)
한일협정이 야권과 학생들로부터 반발을 샀다는 내용은 담았지만 이들이 왜 그랬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반면 비상교육 역사 교과서는 “그러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 일본인 위안부·징용 피해자·원폭 피해자 등에 대한 배상, 약탈 문화재 반환, 독도 문제 등은 해결되지 못하였다”고 반발 이유를 상세하게 담았다.
박 전 대통령이 종신집권을 꾀한 1972년 10월 유신에 대해서도 북한 무장공비들의 청와대 기습작전이었던 1·21사태를 비롯해 미군 철수 등 당시의 상황을 전하며 “이같은 긴박한 분위기에서 박정희는 1971년 12월 국가 비상 사태를 선언하였다. 또한 통제와 동원을 쉽게 하기 위하여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325쪽)라며 유신 체제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데 주력했다.
이밖에 “일제는 1944년 여자 정신 근로령을 발표하고 12세에서 40세까지의 여성들은 침략 전쟁에 동원하였다. 동원된 여성들은 일본과 한국의 군수 공장에서 일하였다. 일부 여성들은 중국, 동남아 일대, 필리핀 등지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로 희생당하였다”(247쪽)는 대목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축소해서 다뤘다는 의심을 사게 한다.
역대 정권 평가에서도 노태우,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부정적 평가가 주로 눈에 띈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교학사 역사 교과서가 내세우는 장점이라 할 만한 점도 눈에 띤다. 우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역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점은 다른 교과서와 차별화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챕터 Ⅵ 5장 ‘북한의 실상과 남북 간의 통일 노력’에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북한의 군사 도발, 남북한 민간인 교류, 북한의 인권 상황, 북한의 군사력 유지와 그 의미 등 10페이지에 걸쳐 북한의 현대사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일제강점기가 조선의 근대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은 없었고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과 관련해 무장독립 투쟁에만 방점을 찍은 기존 교과서들과는 달리 1910∼1920년대 국내외의 실력양성운동과 1920∼1930년대 국외에서 전개된 외교독립운동의 성과 등을 병행해 기술한 점은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한편,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비롯해 지난달 30일 국편에서 최종 합격을 받은 교과서 8종은 이달 달 중 각 학교에 전시돼 학교별 채택과정을 거친 뒤 내년 3월부터 일선 고교에서 사용된다.
진보진영에서는 이 교과서가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확인한 뒤 대응 방안을 마련한다는 입장이어서 국편의 이날 공개는 진보·보수 진영 간의 ‘역사 교과서 전쟁’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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